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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여진, 말갈, 숙신, 선비, 돌궐, 흉노, 훈족

Jobs 9 2021. 3. 1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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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5세기 이래 요하(遼河)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이에 물자가 풍부한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기 위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화북의 연운(燕雲) 16주(州)를 획득,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했으나 960년 송이 건국됨으로써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대제국을 형성한 거란은 북쪽의 초원지대와 남쪽의 농경지대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이원적 호한분치제도(胡漢分治制度)를 형성하였다. 



 

 돌궐

투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화한 말로, 처음에는 철륵(鐵勒: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투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유연(柔然: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족장 토문(土門:만인의 長이라는 뜻)이 유연 ·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552). 

이 무렵부터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켰다(563∼567).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東北: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동돌궐은 수(隋)나라 말기에서 당(唐)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630년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682년 다시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서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결탁하여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둘로 분열하였다. 당나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이주(伊州:하미)와 서주(西州:투르판) 등의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서돌궐은 한때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당은 657년 이를 토벌하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하였다. 7세기 말 돌기시(突騎施)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돌궐은 멸망하였다. 

돌궐의 국가는 일(il)이라 부르며 가한(可汗) 밑에 소가한(小可汗)과 야부그[葉護] ·샤드[設] 등의 제후가 일종의 봉건영지를 소유하여 영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베크[牢羽]’라는 지배계층을 구성하였고, 일반 민중은 ‘부둔’이라고 하였다. 베크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기록, 즉 돌궐비문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샤머니즘을 믿고 있으나, 한때 불교가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 유행하였다.


 말갈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挹婁)라 불렀다. 본래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들 부족 중 대표적인 것은 예맥(濊貊) 계통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속말(粟末), 백산(白山)과 순수 퉁구스계로 수렵에 의존하던 백돌(伯咄) ·불녈(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안차골(安車骨) 등 7개 부족이었다.  

그 중에 속말과 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영주(營州:遼寧省朝陽)로 이주하였고, 후에 발해가 성립되자 대부분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흑수부족만은 쑹화강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고 발해 멸망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女眞)이라 불렀으며, 그후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었다가 생여진은 금(金)나라를 건국시킨 주체가 되었다.

 

 선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국에 자주 침입하고, 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된 동호(東胡)의 후예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선비족이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 1세기 말 북흉노가 후한(後漢)에게 격파되자, 선비는 흉노에 이어 몽골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후 자주 후한에 침입하는 등 중국을 압박하였다.

단석괴가 죽은 후에는 가비능(軻比能)이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중국에 자주 침입하였으나, 그가 위(魏)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다시 분열되어 3세기 중엽에는 모용(慕容)·걸복(乞伏)·독발(禿髮)·탁발(拓跋) 등의 부족집단이 내몽골 각지에 할거(割據)하면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점차 화북(華北)으로 옮겨갔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는 연(燕:모용씨)·진(秦:걸복씨)·양(凉:독발씨)이 화북에서 각각 나라를 세웠고, 북위(北魏:탁발씨)는 화북 전체를 통일하여 이른바 북조(北朝)의 기초를 열었다.




 숙신

고조선 시대에 만주 북동방면에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숙신이라는 호칭은 중국의 《국어(國語)》 《사어(史語)》 및 그 밖의 고전에서 볼 수 있고, 특히 《국어》의 숙신공시(肅愼貢矢)는 전설로도 유명하여 성천자(聖天子)의 출현과 그들의 입조공헌(入朝貢獻)을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의 《사기》에는 식신(息愼)·직신(稷愼)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398년(광개토대왕 8)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일어난 읍루(挹婁)·말갈(靺鞨) 종족이 숙신의 후예로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당(唐)나라 때는 선진(先秦)시대의 북동방면 거주 민족의 총칭으로 쓰였다.  

 

 여진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여진족이 한국과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故土)에 준거한 고려 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왕건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朝貢)하고, 의료 ·식량 ·농기구 ·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소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소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 ·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神騎軍:騎兵) ·신보군(神步軍:보병) ·항마군(降魔軍: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民戶)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또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만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李資謙)과 경주파 문신(文臣)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元) ·명(明)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는 이들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 ·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 ·의복재료 ·농기구 ·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城堡)와 주(州) ·군(郡)과 역참(驛站)을 두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강계부(江界府), 1414년에는 여연군(閭延郡)을 두어 여진의 준동에 대처하였다. 세종은 4군(郡) ·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丁亥西征]하였고, 신숙주(申叔舟)는 회령(會寧)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庚辰北征]한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l만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그 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선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써 조선을 정복,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
 

 흉노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玁狁) ·훈육(獯鬻)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鞮: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 ·술 ·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 ·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 ·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 ·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 ·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郅支單于:西匈奴)와 그 아우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48). 남흉노는 간쑤[甘肅] ·산시[陝西] ·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 ·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 ·북량(北凉) ·하(夏)를 세위,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 ·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91),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그 후 흉노의 잔당들은 선비, 또는 유연(柔然) 등 국가에 복속하였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진(秦) ·한을 위협했던 흉노의 자손이 바로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일으키는 인연이 된 훈족이라는 설이 있다. 이 문제는 처음으로 학계에 제출된 지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흉노의, 다분히 지배층의 서방 이동과 훈족의 서방 이동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훈족이라는 이름이 흉노에 유래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 ·몽골계(系) ·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 ·호연(呼衍) ·수복(須卜) ·난(蘭) ·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 ·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굴된 한식(漢式) 궁전은 흉노에게 항복한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것이라고 한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 ·칠기 ·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 ·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훈족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4세기에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375년 흑해 북안(黑海北岸)의 동(東)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 육박했다. 서고트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東)로마에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일대제국(一大帝國)을 수립했으나, 대제국으로서의 내부적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틸라는 약탈을 일삼았고, 로마제국에 큰 위협을 주면서 다시 서진(西進), 갈리아에의 침입을 꾀하자 서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는 451년 로마군(軍)과 게르만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의 평야에서 이를 무찔러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동화되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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