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줄, 이청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Jobs 9 2020. 6. 1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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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

지은이 : 이청준

갈래 : 단편 소설. 액자 소설. 의식 소설. 예술 소설

성격 : 숙명적, 회상적, 추리적

배경 :

 '나'의 이야기 - 시간(현대). 공간(C읍)

 허 노인과 허운 이야기 - 시간(1940년대 말). 공간(C라는 마을)

문체 : 간결체,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 문체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내부 액자 : 전지적 작가)

  외부 액자 -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이 복합적으로 나타남

  내부 액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액자식 구성

   도입 - '나'가 취재에 나섬

   발단 - 나팔수 노인을 만나 허운의 이야기를 들음   - ‘나’는 승천한 줄광대에 대한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C읍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나’는 서커스단에서 트럼펫을 붙었던 사내로부터 승천한 줄광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개 - 허 노인의 죽음과 허운의 활동 - ‘운’은 아버지인 ‘허 노인’으로부터 줄타기를 배운다. ‘허 노은’은 비록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광대이지만 그는 줄을 탈 때에는 줄타기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철저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로, 좀처럼 ‘운’에게 줄에 오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운’이 줄타기를 배운 지 5년 만에 ‘허 노인’은 아들과 함께 줄에 오르고, 그날 밤 줄에서 떨어져 죽는다.

   위기 - 사랑에 실패하는 허운 - 어느 날, C읍에서 공연을 마친 ‘ 운’은 한 여인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그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 여인은 ‘운’의 사랑을 거부한다. 여인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줄 타는 모습이었음을 ‘운’은 깨닫게 된다.

   절정 - 줄을 타던 허운의 죽음 - 사랑의 실패로 인해 더 이상 줄에 오르기가 어려워진 ‘운’은 줄 위에 올라 최후의 연기를 하다 죽는다.

   결말 - 나팔수 노인의 죽음과 나의 깨달음 -  ‘나’에게 ‘운’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후 트럼펫 부는 사내는 숨을 거둔다.

외화 - 1인칭주인공 '나' - '나'가 C읍에 내려가 트럼펫 부는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들음

내화 - 1인칭관찰자 트럼펫 부는 사내 - 줄타기 광대 허 노인과 허 운 부자의 장인으로서의 삶과 죽음

 

액자식 구성의 효과

액자식 구성은 외화에서 내화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술자가 바뀌는 시점의 이동을 낳게 되고,이로써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된다. 이는 내화에 대해 객관성과 신뢰감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액자식 구성은 주된 이야기 밖에 또 다른 서술자의 시점을 배치함으로써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방식에서 탈피하여 다각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액자식 구성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나란히 진행시킴으로써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반성하려는 소설의 기본적인 정신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이로 인해 외화의 서술자는 내화로 인해 삶의 태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제재 : 2대에 걸친 줄광대의 삶

주제 : 장인 정신과 삶의 진실이 결핍된 오늘의 장인들의 자세 반성, 장인정신의 추구와 현대인의 가치 상실 고발

특징 : 액자 소설의 기법을 통해 인물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제시했고, '줄타기'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묻고 있으며, 주제를 형상화할 수 있는 인물들을 설정함

 

등장 인물 :

허 노인 : '줄타기'의 한 길만을 걸어온 장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소신대로 살아온 장인정신의 소유자

허 운 : 허 노인의 아들로서, 줄광대로서의 길을 고수하기 위해 사랑에 실패하자 죽음을 선택하지만 순종적이고, 정이 많다.

트럼펫 사나이 : 줄광대 '운'의 이야기를 남 기자에게 말해주고, 신중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나 : 신문 기자. 줄광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취재 임무를 달갑게 여기지는 않지만, 줄광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줄거리 : 일상에 묶여 무력하게 살아가던 '나(남기자)'는 '승천(昇天)한 줄광대'에 대한 기사를 취재하라는 부장의 지시에 따라 C읍으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나'는 예전에는 서커스단에서 트럼펫을 불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인이 된 사나이로부터 줄광대 '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운'은 아버지 허 노인으로부터 줄타기를 배운다. 허 노인은 줄타기 한길만을 걸어온 장인(匠人)으로 아들에게 작은 허튼 재주도 용납하지 않는다. 허 노인의 소망대로 운은 마침내 장인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이 사랑한 것은 '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줄 타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줄 위에 올라 최후의 연기를 한 뒤 스스로 떨어져 죽는다.

출전 : <사상계>(1966)

 

내용 연구

(전략) 

"허 노인이 줄을 잘 탔다고 하는 것은 운의 생각입니까, 혹은 노인의 생각입니까?"

나는 트럼펫의 사내가 숨을 좀 돌리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로 뛰어들었다. 사내는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거의 한 번씩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물론 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인께서 운의 생각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렇지요.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 많이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운은 나와 나이가 가장 가까웠으니까 내가 그의 심중을 비교적 많이 이해하는 편이었고, 그도 내게만은 조금씩 얘기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벌써 나팔장이가 다 되었으니 웬만큼 나팔을 불어주고 남은 시간은 그 부자가 지내는 뒷마당에서 보냈었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허 노인이 한번 발을 헛디뎐던 다음 날이었지요. 마침 그 날도 나는 거기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허 노인이 아들의 줄타기를 보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줄 위에 있는 운이 아니라 무섭도록 줄을 쏘아보고 있는 노인의 눈과 땀이 송송 솟고 있는 이마를 보고 있었습니다(줄을 타고 있는 '운'의 모습을 기대와 긴장에 가득차 쳐다보고 있는 허 노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이놈아!' 하고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줄 밑으로 내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야 나는 줄 위를 쳐다 보았지요. 그런데 운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냥 줄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 이놈 ……너는 애비의 말도 듣지 않았느냐?

하고 줄을 내려왔을 때 노인이 호령을 했으나, 운은 역시 어리둥절해 있기만 했어요. 내가 놀란 것은 그 때 허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는 것입니다(허 노인의 호령을 듣지 못할 정도로 줄타기에 몰두한 '운'의 모습에 흐뭇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자는 그 길로 곧 함께 주막 술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사내의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 날 주막에서 허 노인은 운에게 술잔을 따라 주고, 그 날 밤으로 운을 줄(참된 가치를 담고 있는 인간의 삶 그 자체)로 오르라고 했다.

― 줄 끝이 멀리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 되지만 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주객일체(主客一體)], 줄에만 올라서면 거기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게야.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마음이 쏠리는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단 말이다.(제일 위험한 - 한단 말이다 : 줄을 타는 정신적 자세에 대해서 허 노인이 운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허노인은 눈과 귀가 명리를 추구하는 땅의 세상을 향해 열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오직 줄타기에만 삶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두려는 허 노인의 장신 정신이 잘 표출되어 있다.)

노인은 조용조용 당부를 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노인의 일생을 몇 개로 잘라서 압축해 놓은 듯한 무게와 힘과,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자기의 전 생애를 운에게 떠넘겨 주려는 듯한 안간힘이 거기에는 있는 것 같았다. 운은 비로소 허 노인이 끝끝내 줄타기 자세를 바꾸지 못하는 내력을 알 것 같았다.(허 노인은 서커스 단장으로부터 줄을 탈 때 재주를 부리라는 요구를 받지만 허 노인은 줄타기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 아버지, 이젠 줄을 그만두시고 좀 쉬십시오.

운이 말했으나 노인은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 (단호한 목소리로) 줄에서 내 발바닥의 기력이 다했다고 다른 곳을 밟고 살겠느냐?(천한 줄타기 광대로 살아왔지만 줄을 타다가 죽을지언정 다른 데 뜻을 두지 않겠다는 허 노인의 집념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이 타자.

그 날 밤, 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올라섰다. 운이 앞을 서고 허 노인이 뒤를 따랐다. 운이 줄을 다 건넜을 때는 객석이 뒤숭숭하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뒤를 따르던 허 노인이 줄에서 떨어져 이미 운명을 하고 만 뒤였다.(죽는 날까지 줄과 함께하는 허 노인의 장인 정신과 자세로 우리 속담에 '고리쟁이가 죽어도 버들가지를 물고 죽는다'와 일맥상통)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나는 사내에게 더 이야기를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허 노인이 운에게 마지막 당부를 할 때 그랬을 법한 컴컴하고 무거운 것이 이 사내에게서 쉴 사이 없이 흘러나왔다(마치 허 노인이 - 없이 흘러 나왔다 : 촌구석에서 시시한 이야기를 취재하리라던 '나'의 예상을 뒤엎고 줄광대 부자의 이야기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무기력하고 냉소적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많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집요한 이야기로써 사내가 나에게 떠맡기려는 것의 무게를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아닙니다, 마저 끝냅시다. 곧 끝납니다."

사내는 아직도 고집을 세우며 이야기를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보다 잦은 사내의 기침 소리를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내 방을 나와 버렸다. 부엌 방에는 이제 불이 켜 있었으나 역시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나는 곧장 어제의 여관으로 돌아와 자리로 들었다. 사내의 이야기는 문화부장이 기대한 것과는 성질이 다를지 몰라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노인의 운명 ― 그 논리 이상으로 정연한 질서는 허 노인이 죽은 지금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허 노인은 줄을 지배하지 못하고 줄이 그를 지배했다. 그게 아름다움이라는 것인가. 또, 운은 노인의 무거운 운명을 떠맡아 지고 어떻게 자기 인생을 구축해 갈 수 있었는지. 장의사 사내의 이야기로는 운도 마찬가지로 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 운은 노인의 인생을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또 운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한참 하고 있는데 어젯밤의 여자가 불쑥 문을 들어섰다. 나는 여자가 좀 수상쩍었으나 이것저것 묻기가 귀찮아서 그냥 옆에 눕게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곧 피곤해져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역시 여자는 가고 없었고, 윗주머니의 돈이 꼭 삼백 원이 줄어 있었다. 시계가 열 두 시를 넘고 있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이 여관을 나와 다릿목으로 해서(다릿목에서는 장의사의 사내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아직 떠나지 않으셨군요."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중국집을 들렀다가 어제처럼 입가심을 사들고는 다시 '사꾸라 공원' 중턱의 사내에게로 갔다. 부엌방 문 앞에는 여자 고무신이 어제 그대로인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고, 사내의 방에서는 역시 역한 냄새가 코도 거치지 않고 내장으로 스며들었다. 사내의 숨소리가 어제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사내는 내가 쑥스러워질 만큼 새삼스럽게 반기고는 곧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니까 그 뒤로 운이 허 노인의 당부대로 줄을 탔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역시 전에 허 노인이 당하던 단장의 꾸지람을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단장은 물질적 이익을 우선하는 인물로, 줄광대 부자의 장인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위험한 재주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는 꾸지람(손님이 즐거워하도록 다양한 재주를 피우라는 주문)을 듣고 있을 때까지도 영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만 하곤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단장도 그런 운을 늘 나무랄 수만은 없게 되었어요. 활동 사진이라는 것이 갑자기 성하지 않았습니까(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드러나 있고, 당시는 줄타기보다는 활동 사진이 성행하는 시기였으므로 줄타기를 하는 허운과 같은 사람은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 쪽에 손님을 다 빼앗기고 나니 우리는 거렁뱅이가 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장이 그래도 그 중 나았습니다. 생각생각하다가 짜낸 것이 결국 구경꾼의 흥을 더 돋구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래 그 방편으로 제일 적합한 것이 운이었습니다. 줄을 그전 때보다 두 배, 세 배로 높이 매달았습니다(공연의 긴장을 높여 관중을 더 많이 모으려는 의도). 허 노인도 여느 광대보다 높이 줄을 탔기 때문에 가설 극장의 천정 포장을 걷어 내야 했지만 이번에는 거기 비교가 안 될 정도였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C읍까지 왔었습니다. 그 땐 가을이었지요."

C읍에서 ― 어느 날 밤, 운이 줄에서 내려와 보니 그에게 꽃다발이 하나 와 있었다. 꽃다발이라야 그 즈음 산이나 들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국화를 몇 송이 꺾어다 종이 리본으로 묶은 것이었지만, 워낙 처음 있는 일이라 부처님 같은(감정의 표현을 좀처럼 하지 않는) 운도 약간 호기심이 들었다. 꽃다발을 가져온 것은 소녀끼를 갓 벗은 여자라고 했다.

― 잘 해 봐라 이 녀석. 총각 귀신은 제사도 없단다.

트럼펫의 사내가 웃으면서 그 꽃다발을 운에게 건네 주었다. 여자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하고 갔지만, 언제나 운이 줄을 올라간 뒤에 왔다가 줄에서 내려오기 전에 가 버리기 때문에 정작은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매일밤 꽃다발을 맡았다 운에게 전해 주던 트럼펫이 보다 못해 하룻밤은 일을 꾸몄다.

― 공원으로 가 봐라. 거기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운이 줄에서 내려오자 트럼펫은 운에게 일러 주었다.

"지금 이야기 중의 트럼펫이라는 운의 친구가 바로 노인이시겠지요?"

나는 갑자기 이 사내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나팔을 불고 나면 조금씩 피를 뱉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입에서 나팔을 뗄 수는 없었습니다. 나팔을 불지 못하면 진짜로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노인께서 여길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도 폐 때문인 것 같은데 그 때 노인께서는 독신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독신이었는데, 갑자기 각혈이 심해져서……."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그랬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누군가를 따라 떠났어야 할 이유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폐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지도 않은가. 그렇다면 ― 이 사내는 혹시 운을 찾아오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나 사내는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이야기를 서둘러 계속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나는 운이 여자를 만나게 해 주었는데, 여자를 만나고 와서도 운은 별로 달라진 게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한 주일쯤 계속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운이 줄 위에서 재주를 피우기 시작했단 말이에요(여자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재주를 부리는 운). 단장이나 구경꾼들은 무척들 좋아했지요. 하지만 나는 옛날 허 노인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었던 만큼 그게 불안했습니다. 몇 번씩 그런 재주 같은 동작을 하고 줄을 내려온 운은 유독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고, 단장의 칭찬에도 넋 나간 눈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나의 생각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어요. 운이 자꾸 귀와 눈을 때리면서 혼자 중얼중얼하는 것이었습니다(운이 매우 불안한 심리 상태에 있음을 암시). 못 견뎌 하는 얼굴이었어요. 허 노인이 운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함성들을 지르고 좋아들 했거든요. 불행한 일이었지만,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은 곧 증명이 되었어요(이후 운이 공연 연장을 자청하고 공연 도중 줄에서 떨어져 죽을 것을 예감한 것이다). 어느 날 밤, 줄을 타고 내려온 운은 또 공원으로 갔고, 우리는 나머지 순서와 곡예에 곁들인 연극까지 끝내고 났을 때예요……."

구경꾼이 막 자리를 일어서려는 참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운이 사례 인사를 끝내고 섰는 무대 위의 단장 앞으로 나섰다.

"―오늘 밤 한 번 더 줄을 타겠습니다.(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줄타기)"

"―아니, 왜?"

단장이 의아해서 운을 쳐다봤다. 그러나 단장은 다시 아무 말도 못하고 운에게서 눈을 피했다. 운의 눈에서는 무서운 불길(줄을 타다가 줄타기 광대로서 죽겠다는 단호한 결의)이 일고 있었다. 그 눈은 단장을 보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단장은 한 번 더 줄을 타겠다는 운의 말이 정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은 이미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운을 비켜섰다. 운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서 그 높은 항목을 한 번 눈이 부신 듯이 쳐다보고는 이내 그것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이 기울이고 운의 거동을 살피고 있다가 갑자기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마이크를 힘껏 거머쥐었다.

"―여러분, 앉으십시오. 오늘 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 서커스 단의 프로 중의 백미를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보여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즉 보시다시피 인간의 승천(昇天)입니다(운의 죽음을 암시). 인간의 승천!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우리 단(團)이 아니면 보실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입니다……." 

"그 날 밤, 운은 떨어져 죽었습니다."('운'의 죽음에 내포된 의미는 장신 정신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표면상 운이 줄타기에 실패하고 죽음에 이른 것은 허 노인의 당부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허 노인의 당부 속에는 줄을 탈 때에는 오로지 줄타기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투철한 장인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운은 이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 죽음은 지상에서 자신의 삶의 영토을 상실하고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길이었다. 그는 기꺼이 줄에서 죽음으로써 진정한 승천을 이룩한 셈이다.)

"한데, 그 날 밤 운은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요?"

"네, 혹시 그 말씀에 해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운이 만나던 그 여자의 이야기를 마저 해 드리겠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아무래도 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대강 일이 정리되었을 때 공원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공원이래야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땐 벌써 고목이 다 된 벚나무 사이에 촉수 낮은(희미한) 전등을 몇 개 매달아 놓고, 군데군데 녹색 페인트 칠을 한 걸상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걸상 하나에 여자는 내가 올라갔을 때까지 아직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죽음의 위협으로 인해 겁에 질린 여인의 모습). 운이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 말고 공원을 내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서술자가 요약적으로 제시). 그 며칠을 통해 운이 여자에게 한 말을, 여자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운의 말은 불과 다섯 마디도 되지 못했으니까요(과묵한 운의 성격). 물론 사랑은 배워서 말로 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배우지 않고도 아는 방법으로만 그는 여자를 사랑했겠지요. 마지막 날 이야기가 이랬다고 합니다. 갑자기 운이 여자를 끌어안고서,

―난 이제 줄을 탈 수가 없다. 넌 나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운'에게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일에 눈과 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더 이상 줄타기의 세계에 순수하게 집중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운은 마치 줄에서 내려왔을 때처럼 땀을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여자는 운이 그렇게 가까이만 있으면 언제나 무서워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운'을 실제로 만난 여인이 자신이 '운'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말이다)

―그럼? 그럼?

운은 미친 사람처럼 여자를 안은 팔에 바싹 힘을 주었습니다.(허 노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줄광대는 생각이 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자 운은 줄 위에서도 땅의 여인을 생각하게 된다. 허운에게는 '여자'도 '줄타기'도 모두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에 대한 사랑과 실망은 허운의 내면 세계를 여지없이 흔들어 놓게 된다. 즉,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허운의 가치관에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는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운은 줄광대로서 자신의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운'에게 '여자'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겠다.)

―줄을 타고 계실 때, 그 땐 그런 것 같았는데, 이렇게 옆에만 오시면…… 무서워요.

-아야, 이젠 난 줄을 탈 수가 없는데…….[진퇴양난(進退兩難)]

그러고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운의 손이 천천히 여자의 목으로 올라오더니 조금 있다가 그 손은 경련이 난 듯 여자의 가는 목을 조르기 시작하더랍니다. 여자는 별로 반항도 하지 않고 걸상에 쓰러졌는데, 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갑자기 손을 놓아 버리고는(여자를 죽여도 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듦) 일어서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혼자 중얼중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다시 줄을 탈 수 있었지만(허 노인이 '운'의 어머니를 죽이게 된 정황과 이유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허 노인은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줄타기의 세계를 고집하고 지켜 왔으나 '운' 자신은 그럴 자신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왜나햐먼 여자 문제로 더 이상 줄을 탈 수 없게 되었음을 절규하고 있다.), 아아…… 나는…….('운'은 '허 노인'에 비해 정이 많고 심약한 인물로 줄을 탈 수 없다는 갈등의 표출)

그러다가 운은 산을 내려가 버렸답니다."['허 부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내'의 태도는 심오한 의미를 지닌 듯 신성하고 엄숙하게 여기고 있다] 

사내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었던 것처럼 열심히, 그러고 상상으로는 미치지 못할 자세한 부분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오그라뜨리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끝까지 이야기를 못하고 기어이 발작을 시작하고 말았다. 나는 사내가 발작을 멎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이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이 대목에서 '나'의 진지하지 못한 '나'의 성격이 드러남. 사내는 병세가 심하지만 운의 삶을 '나'에게 진지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내의 모습을 진지하게 듣지 못한다.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나'가 가벼운 것만을 지향하는 무책임한 현대인의 전형적인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사내에게 혼자는 더 말을 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운은 처음부터 자기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두 번째 줄로 올라간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왜 운을 사랑할 수가 없었을까요?"

"글쎄 그게 이상합니다만…… 참 이걸 말씀드릴 걸 잊었군요. 그 여자는 한쪽다리를 절고 있었어요. 절름발이였단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자꾸 그 여자가 좋아한 것은 운이 아니라 운의 다리가 아니었나 해요(줄타기는 운을 좋아했던 여자가 운이 함께 살자고 제의했을 때 왜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여자는 줄을 타는 운만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이다. 즉, 운의 뛰어난 운동 능력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여자는 줄 위의 운이 하늘을 날고 있는 학(鶴)(지상의 한계를 이겨 내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이미지)으로 생각했더랍니다. 어떻든 그렇게 운이 죽고 나서 얼마가 지나니까, 이곳 사람들은 광대가 승천을 했다고(반어적 의미로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라 승천하여 줄타기 광대로서의 자신의 삶을 완성한 것)들 말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 단장의 말을 빌어서 한 비웃음이었겠지요. 그러나 오랜 시일이 지나다 보니 운은 정말로 승천을 했다고(미화적 표현) 믿어버리게 되었어요(오랜 시일이 - 버리게 되었어요: 이 대목은 허운이 죽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운이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대목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운의 죽음은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죽음으로써 승화시킨 것이다. 이는 곧 장인 정신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자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인 것이다. 운은 줄에서 죽음으로써 진정한 승천을 이룬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아직 운이 줄을 타는 그 곧고 유연한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데…… 아마 그게 명인(名人)의 풍모(줄을 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운의 재능을 지칭하는 말로 이는 줄타기 광대라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하여 애쓴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어요."

"그럼 그 절름발이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나'의 속물적인 근성이 드러남)

"그 여자도 뒤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내의 눈동자는 처음 내가 찾아왔을 때처럼 나의 머리 위 허공으로 멀리 떠올라 가 버렸다. 

 

 

(전략)

"허 노인이 줄을 잘 탔다고 하는 것은 운의 생각입니까, 혹은 노인의 생각입니까?"

나는 트럼펫의 사내가 숨을 좀 돌리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로 뛰어들었다. 사내는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거의 한 번씩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물론 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인께서 운의 생각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렇지요.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 많이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운은 나와 나이가 가장 가까웠으니까 내가 그의 심중을 비교적 많이 이해하는 편이었고, 그도 내게만은 조금씩 얘기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벌써 나팔장이가 다 되었으니 웬만큼 나팔을 불어주고 남은 시간은 그 부자가 지내는 뒷마당에서 보냈었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허 노인이 한번 발을 헛디뎐던 다음 날이었지요. 마침 그 날도 나는 거기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허 노인이 아들의 줄타기를 보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줄 위에 있는 운이 아니라 무섭도록 줄을 쏘아보고 있는 노인의 눈과 땀이 송송 솟고 있는 이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이놈아!' 하고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줄 밑으로 내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야 나는 줄 위를 쳐다 보았지요. 그런데 운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냥 줄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 이놈 ……너는 애비의 말도 듣지 않았느냐?

하고 줄을 내려왔을 때 노인이 호령을 했으나, 운은 역시 어리둥절해 있기만 했어요. 내가 놀란 것은 그 때 허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그 길로 곧 함께 주막 술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사내의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 날 주막에서 허 노인은 운에게 술잔을 따라 주고, 그 날 밤으로 운을 줄로 오르라고 했다.

― 줄 끝이 멀리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 되지만 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 줄에만 올라서면 거기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게야.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단 말이다.

노인은 조용조용 당부를 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노인의 일생을 몇 개로 잘라서 압축해 놓은 듯한 무게와 힘과,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자기의 전 생애를 운에게 떠넘겨 주려는 듯한 안간힘이 거기에는 있는 것 같았다. 운은 비로소 허 노인이 끝끝내 줄타기 자세를 바꾸지 못하는 내력을 알 것 같았다.

― 아버지, 이젠 줄을 그만두시고 좀 쉬십시오.

운이 말했으나 노인은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줄에서 내 발바닥의 기력이 다했다고 다른 곳을 밟고 살겠느냐? 같이 타자.

그 날 밤, 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올라섰다. 운이 앞을 서고 허 노인이 뒤를 따랐다. 운이 줄을 다 건넜을 때는 객석이 뒤숭숭하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뒤를 따르던 허 노인이 줄에서 떨어져 이미 운명을 하고 만 뒤였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나는 사내에게 더 이야기를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허 노인이 운에게 마지막 당부를 할 때 그랬을 법한 컴컴하고 무거운 것이 이 사내에게서 쉴 사이 없이 흘러나왔다. 이 믿어지지 않는 집요한 이야기로써 사내가 나에게 떠맡기려는 것의 무게를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아닙니다, 마저 끝냅시다. 곧 끝납니다."

사내는 아직도 고집을 세우며 이야기를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보다 잦은 사내의 기침 소리를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내 방을 나와 버렸다. 부엌 방에는 이제 불이 켜 있었으나 역시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나는 곧장 어제의 여관으로 돌아와 자리로 들었다. 사내의 이야기는 문화부장이 기대한 것과는 성질이 다를지 몰라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노인의 운명 ― 그 논리 이상으로 정연한 질서는 허 노인이 죽은 지금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허 노인은 줄을 지배하지 못하고 줄이 그를 지배했다. 그게 아름다움이라는 것인가. 또, 운은 노인의 무거운 운명을 떠맡아 지고 어떻게 자기 인생을 구축해 갈 수 있었는지. 장의사 사내의 이야기로는 운도 마찬가지로 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 운은 노인의 인생을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또 운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한참 하고 있는데 어젯밤의 여자가 불쑥 문을 들어섰다. 나는 여자가 좀 수상쩍었으나 이것저것 묻기가 귀찮아서 그냥 옆에 눕게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곧 피곤해져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역시 여자는 가고 없었고, 윗주머니의 돈이 꼭 삼백 원이 줄어 있었다. 시계가 열 두 시를 넘고 있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이 여관을 나와 다릿목으로 해서(다릿목에서는 장의사의 사내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아직 떠나지 않으셨군요."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중국집을 들렀다가 어제처럼 입가심을 사들고는 다시 '사꾸라 공원' 중턱의 사내에게로 갔다. 부엌방 문 앞에는 여자 고무신이 어제 그대로인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고, 사내의 방에서는 역시 역한 냄새가 코도 거치지 않고 내장으로 스며들었다. 사내의 숨소리가 어제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사내는 내가 쑥스러워질 만큼 새삼스럽게 반기고는 곧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니까 그 뒤로 운이 허 노인의 당부대로 줄을 탔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역시 전에 허 노인이 당하던 단장의 꾸지람을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꾸지람을 듣고 있을 때까지도 영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만 하곤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단장도 그런 운을 늘 나무랄 수만은 없게 되었어요. 활동 사진이라는 것이 갑자기 성하지 않았습니까. 그 쪽에 손님을 다 빼앗기고 나니 우리는 거렁뱅이가 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장이 그래도 그 중 나았습니다. 생각생각하다가 짜낸 것이 결국 구경꾼의 흥을 더 돋구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래 그 방편으로 제일 적합한 것이 운이었습니다. 줄을 그전 때보다 두 배, 세 배로 높이 매달았습니다. 허 노인도 여느 광대보다 높이 줄을 탔기 때문에 가설 극장의 천정 포장을 걷어 내야 했지만 이번에는 거기 비교가 안 될 정도였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C읍까지 왔었습니다. 그 땐 가을이었지요."

C읍에서 ― 어느 날 밤, 운이 줄에서 내려와 보니 그에게 꽃다발이 하나 와 있었다. 꽃다발이라야 그 즈음 산이나 들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국화를 몇 송이 꺾어다 종이 리본으로 묶은 것이었지만, 워낙 처음 있는 일이라 부처님 같은 운도 약간 호기심이 들었다. 꽃다발을 가져온 것은 소녀끼를 갓 벗은 여자라고 했다.

 ― 잘 해 봐라 이 녀석. 총각 귀신은 제사도 없단다.

트럼펫의 사내가 웃으면서 그 꽃다발을 운에게 건네 주었다. 여자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하고 갔지만, 언제나 운이 줄을 올라간 뒤에 왔다가 줄에서 내려오기 전에 가 버리기 때문에 정작은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매일밤 꽃다발을 맡았다 운에게 전해 주던 트럼펫이 보다 못해 하룻밤은 일을 꾸몄다.

― 공원으로 가 봐라. 거기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운이 줄에서 내려오자 트럼펫은 운에게 일러 주었다.

"지금 이야기 중의 트럼펫이라는 운의 친구가 바로 노인이시겠지요?"

나는 갑자기 이 사내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나팔을 불고 나면 조금씩 피를 뱉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입에서 나팔을 뗄 수는 없었습니다. 나팔을 불지 못하면 진짜로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노인께서 여길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도 폐 때문인 것 같은데 그 때 노인께서는 독신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독신이었는데, 갑자기 각혈이 심해져서……."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그랬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누군가를 따라 떠났어야 할 이유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폐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지도 않은가. 그렇다면 ― 이 사내는 혹시 운을 찾아오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나 사내는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이야기를 서둘러 계속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나는 운이 여자를 만나게 해 주었는데, 여자를 만나고 와서도 운은 별로 달라진 게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한 주일쯤 계속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운이 줄 위에서 재주를 피우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단장이나 구경꾼들은 무척들 좋아했지요. 하지만 나는 옛날 허 노인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었던 만큼 그게 불안했습니다. 몇 번씩 그런 재주 같은 동작을 하고 줄을 내려온 운은 유독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고, 단장의 칭찬에도 넋 나간 눈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나의 생각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어요. 운이 자꾸 귀와 눈을 때리면서 혼자 중얼중얼하는 것이었습니다. 못 견뎌 하는 얼굴이었어요. 허 노인이 운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함성들을 지르고 좋아들 했거든요. 불행한 일이었지만,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은 곧 증명이 되었어요. 어느 날 밤, 줄을 타고 내려온 운은 또 공원으로 갔고, 우리는 나머지 순서와 곡예에 곁들인 연극까지 끝내고 났을 때예요……."

구경꾼이 막 자리를 일어서려는 참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운이 사례 인사를 끝내고 섰는 무대 위의 단장 앞으로 나섰다.

"―오늘 밤 한 번 더 줄을 타겠습니다."

"―아니, 왜?"

단장이 의아해서 운을 쳐다봤다. 그러나 단장은 다시 아무 말도 못하고 운에게서 눈을 피했다. 운의 눈에서는 무서운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 눈은 단장을 보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단장은 한 번 더 줄을 타겠다는 운의 말이 정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은 이미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운을 비켜섰다. 운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서 그 높은 항목을 한 번 눈이 부신 듯이 쳐다보고는 이내 그것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이 기울이고 운의 거동을 살피고 있다가 갑자기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마이크를 힘껏 거머쥐었다.

"―여러분, 앉으십시오. 오늘 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 서커스 단의 프로 중의 백미를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보여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즉 보시다시피 인간의 승천(昇天)입니다. 인간의 승천!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우리 단(團)이 아니면 보실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입니다……."

"그 날 밤, 운은 떨어져 죽었습니다."

"한데, 그 날 밤 운은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요?"

"네, 혹시 그 말씀에 해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운이 만나던 그 여자의 이야기를 마저 해 드리겠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아무래도 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대강 일이 정리되었을 때 공원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공원이래야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땐 벌써 고목이 다 된 벚나무 사이에 촉수 낮은 전등을 몇 개 매달아 놓고, 군데군데 녹색 페인트 칠을 한 걸상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걸상 하나에 여자는 내가 올라갔을 때까지 아직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운이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 말고 공원을 내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며칠을 통해 운이 여자에게 한 말을, 여자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운의 말은 불과 다섯 마디도 되지 못했으니까요. 물론 사랑은 배워서 말로 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배우지 않고도 아는 방법으로만 그는 여자를 사랑했겠지요. 마지막 날 이야기가 이랬다고 합니다. 갑자기 운이 여자를 끌어안고서,

―난 이제 줄을 탈 수가 없다. 넌 나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

운은 마치 줄에서 내려왔을 때처럼 땀을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여자는 운이  그렇게 가까이만 있으면 언제나 무서워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럼? 그럼?

운은 미친 사람처럼 여자를 안은 팔에 바싹 힘을 주었습니다.

―줄을 타고 계실 때, 그 땐 그런 것 같았는데, 이렇게 옆에만 오시면…… 무서워요.

-아야, 이젠 난 줄을 탈 수가 없는데…….

그러고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운의 손이 천천히 여자의 목으로 올라오더니 조금 있다가 그 손은 경련이 난 듯 여자의 가는 목을 조르기 시작하더랍니다. 여자는 별로 반항도 하지 않고 걸상에 쓰러졌는데, 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갑자기 손을 놓아 버리고는 일어서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혼자 중얼중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다시 줄을 탈 수 있었지만, 아아…… 나는…….

그러다가 운은 산을 내려가 버렸답니다."

사내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었던 것처럼 열심히, 그러고 상상으로는 미치지 못할 자세한 부분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오그라뜨리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끝까지 이야기를 못하고 기어이 발작을 시작하고 말았다. 나는 사내가 발작을 멎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이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이제 사내에게 혼자는 더 말을 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운은 처음부터 자기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두 번째 줄로 올라간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왜 운을 사랑할 수가 없었을까요?"

"글쎄 그게 이상합니다만…… 참 이걸 말씀드릴 걸 잊었군요. 그 여자는 한쪽다리를 절고 있었어요. 절름발이였단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자꾸 그 여자가 좋아한 것은 운이 아니라 운의 다리가 아니었나 해요. 여자는 줄 위의 운이 하늘을 날고 있는 학(鶴)으로 생각했더랍니다. 어떻든 그렇게 운이 죽고 나서 얼마가 지나니까, 이곳 사람들은 광대가 승천을 했다고들 말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 단장의 말을 빌어서 한 비웃음이었겠지요. 그러나 오랜 시일이 지나다 보니 운은 정말로 승천을 했다고 믿어버리게 되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나도 아직 운이 줄을 타는 그 곧고 유연한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데…… 아마 그게 명인(名人)의 풍모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어요."

"그럼 그 절름발이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여자도 뒤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내의 눈동자는 처음 내가 찾아왔을 때처럼 나의 머리 위 허공으로 멀리 떠올라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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