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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

YH사건, 1979년, 신민당 당사, 부마항쟁, 노동운동

1979년 8월 9일∼11일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 중 1인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사망한 사건. 1966년 설립된 YH무역주식회사는 197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4천여 명에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고, 수 차례 노조 결성 시도가 실패한 후인 1975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YH무역의 경영주는 경영부실 상황에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으며, 노동자 인원 감축, 위장 휴업, 하청화 등을 단행하였다. YH노조는 1978년 5월, 1979년 4월에 회사측의 폐업 철회 등을 요구하며 농성..

부마민주항쟁, 1979년, 부산, 마산, 유신체제,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

10·26사태(十二六事態), 1979년,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安家), 김재규(金載圭), 박정희(朴正熙)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살해한 사건. 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등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몰락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그 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로의 중복, 과잉 투자로 인..

12·12군사반란, 1979년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5·17사건, 5·18사건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崔圭夏)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12·12군사반란·12·12하극상·12·12쿠데타·12·12쿠데타적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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