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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4

임신약조(壬申約條),1512년,중종,일본 대마도주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해 왜인과의 교통을 끊고 방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을 느낀 대마도주는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왕사(國王使) 호추(弸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화 반대론도 많았지만, 첫째 군사 방위 시설의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둘째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셋째 후추[胡椒]·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넷째 조선은 지리적으로 사실상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 필수품인 식량 등이 ..

삼포왜란,1510년,중종,일본거류민 폭동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富山浦)주 01)와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 熊川), 1426년(세종 8) 염포(鹽浦)주 02)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

사량진왜변,1544년,중종,통영 사량진

조선 1544년(중종 39) 4월 경상도 통영시 사량진에서 일어난 왜인들의 약탈사건.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에서는 임신약조를 맺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왔다. 그러던 중 1544년 4월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萬戶) 유택(柳澤)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인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무렵의 일본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때문에 국내가 혼란하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조광조,,주초위왕(走肖爲王),김정(金淨),김식(金湜),남곤(南袞),심정(沈貞)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유생 200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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