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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 2

묘청(妙淸), 정지상, 백수한, 서경천도, 승려, 묘청의난, 풍수지리, 도참사상, 임원궁

고려전기 정지상, 백수한 등의 지지로 서경천도론을 제기한 승려. 서경(西京) 사람이나, 속성(俗姓)과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이라 고쳤다. 승려이면서도 도교(道敎)적인 요소를 함께 갖추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圖讖思想)을 익힌 후 이를 바탕으로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1128년(인종 6)에 같은 서경 사람인 정지상(鄭知常), 분사검교소감(分司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 근신(近臣) 김안(金安)·홍이서(洪彝敍)·이중부(李仲孚),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상경(上京)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그곳으로 천도하자고 했다.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이..

김부식(金富軾), 위계정, 묘청의난, 정지상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김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김부식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김근(金覲) 때부터였다.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부식은 13·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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