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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4

호란, 북벌 운동, 서인,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유호란, 정묘약조, 병자호란, 효종

호란과 북벌 운동 ․광해군 (1608~1623) - 史庫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 뛰어난 외교정책 (강홍립의 후금투항) ․인조 (인조반정,1623) - 서인 집권, 向明排金 - 이괄의 난 (인조반정에 대한 공신책정에 불만) → 후금의 침략 종용 - 정유호란 (인조 5년,1627) → 형제관계 수립 - 정묘약조 : 주전(척화론)>주화론 ․병자호란 - 후금의 淸 개국 (인조 14년,1636) → 조선에게 군신관계 요구 → 병자호란 발발 -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 → 삼전도에서 항복 - 소현세자, 봉림대군 볼모 척화파인 3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 죽음, 김상헌 옥고 ․효종 - 북벌계획, 북한산성·남한산성 수리 기출 문제 Q 다음의 밑줄 친 비석이 세워진 계기가 된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인조반정,1623년,광해군,이귀,서인,이이첨,대북파,능양군 종(綾陽君倧)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주 02)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주 03)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

김자점의 옥(金自點─獄),1651년,효종,인조반정,김자점 역모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역모로 일어난 옥사(獄事). 이귀(李貴)·김류(金瑬) 등과 더불어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녹되었다. 그리고 집권 공서파(功西派)의 영수가 되어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淸西派)를 탄압하였다. 또한,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주 01)와 혼인시켜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9년효종이 즉위하자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金餘慶)과 집의 송준길(宋浚吉) 및 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

이괄의 난(李适─亂), 1624년(인조 2), 인조반정, 병자호란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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