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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6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년, 광해군, 정인홍, 조식, 이언적, 이황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을 거론하며 비판한 사건.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해주옥사(海州獄事), 1616년, 광해군, 이이첨, 대북, 소북

1616년(광해군 8) 집권 세력의 압력으로 인해 빚어진 역모 혐의자 처리 사건. 이 사건은 전 해에 일어난 ‘신경희(辛景禧)의 옥사(獄事)’로 소북 세력으로부터 적지 않은 공세를 겪은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 세력이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소북 세력을 누르려는 목적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대북 세력과 소북 세력의 대립을 통해 대북이 정권을 독점해가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빚어졌으며, 그 뒤 서인 세력이 집권한 뒤 사건의 전말이 재해석됨으로써 오늘날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이 전개되었다. 당시 대북 세력은 반대 세력에 속한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이 황해도로 귀양간 때에 “구월산에 큰 도적이 숨어 있다.”는 말을 퍼뜨리고, 해주민으로 행실이..

인조반정,1623년,광해군,이귀,서인,이이첨,대북파,능양군 종(綾陽君倧)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주 02)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주 03)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

부차전투, 조선,명나라,만주 부차,후금,광해군,강홍립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이민환(李民寏)·이정남(李珽男)·김응하(金應河)·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에도막부,강화조약,통신사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에도막부[江戶幕府]와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전쟁 뒤 10년 만에 그들의 지속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이 조약이 성립되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 측에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이에 앞서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이러한 끈질긴 요청에 우리 측도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국교를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할 계획을 세웠..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광해군,대북파,영창대군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칠서지옥(七庶之獄)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사(賜死)를 주도하고 소북파를 축출시켰다. 이후 영창대군 및 그 주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하였는데,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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