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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4

권근(權近), 공민왕, 우왕,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배원친명

조선전기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주 01)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즉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

흥왕사의 변, 1363년, 공민왕, 김용, 홍건적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金鏞)이 왕을 살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1359년에 뒤이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침입하였다. 이 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김용·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

복주천도(福州遷都),1361년,공민왕, 홍건적,제2차 침입,복주(福州),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1361년(공민왕 10) 11월 홍건적(紅巾賊)의 제2차 침입 때 공민왕이 개경에서 복주(福州)로 도읍을 옮긴 사건. 복주천도(福州遷都)는 원나라 말엽 홍건적의 발흥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과 연관되어 있다. 홍건적은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렀으므로 홍건적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13세기 전반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몽고족(원)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홍건적의 유명한 지도자였으며 이들은 원의 통치질서를 크게 와해시켰다. 홍건적의 일부는 원나라 군사에 쫓겨 요동 지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3..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정동행성, 공민왕

원은 고려와 강화한 이후 한반도 서북면 일대에는 동녕부를 설치하고, 동북면 일대에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탐라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원의 직할 영역으로 삼아 직접 지배하였습니다. △ 원의 고려 간섭 쌍성총관부는 동녕부보다 앞선 1258년에 설치되었습니다. 동녕부는 고려에 곧 반환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진족이 다수 거주하는 등 민족 구성과 역사가 복잡하고, 원이 고려를 침략할 때 길목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몽골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동북면의 주민 조휘와 탁청이 병마사 등을 살해하고 고려를 배반, 몽골에 투항하는 자들도 늘어났으며, 여러 지역이 원에 항복하여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이에 원은 철령을 경계로 몽골에 항복한 조휘를 쌍성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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