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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반복, 역사의 진보, History repeats itself

Jobs 9 2024. 3. 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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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반복, 진보

쇼펜하우어는 역사의 반복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세상은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동기가 고상하건 천하건 간에 인간의 모든 정열은 파국으로 치닫는다고 기술했다.
또한 아널드 토인비도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단지 비극의 주인공의 이름, 전투의 형식, 전쟁의 영웅만이 바뀔 뿐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을 반복하는 것일까? 그것은 각 시대마다 발생하는 전쟁과 재앙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연유하는데 그는 그것들의 대부분 인간의 惡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를 거시적 측면에서 관찰해 보면 몇몇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각 시대마다 발생한 전쟁이 그랬고, 독재자의 등장으로 무고한 민중의 대량 학살이 그랬다.
인간의 삶에는 수많은 우연성이 개입된다. 그러나 이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뒤에는 어떤 숨겨진 필연성, 질서, 합리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화하듯, 한 문명이나 인간이 번창하고 멸망하는 것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우주의 논리에 따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역사가 영원한 반복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부정 그 자체일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환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건 결국 인간은 결정론을 피할 수 없으며, 역사의 흐름에 덜미를 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런 사고는 현실개혁의 의지를 소멸케 하는 보수주의와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생활 수준과 생활양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이 사실만으로 우리는 문명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받아들인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가 반드시 물질의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신앙에 의해 지배되었던 중세가 무너지고 이성이 중시된 근대가 도래한 17세기경에 등장했다. 당시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기술산업은 크게 발전했고, 무역과 상업, 해외진출이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물질적 풍요가 증대하면서 사람들은 인류의 진보를 신임하게 되었다. 생산물의 증가는 자연과의 갈등과 싸움을 해결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즉, 인류의 진보는 자연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인간에게 그것은 자유를 의미했다. 이러한 개념은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크게 옹호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연의 법칙과 역사의 법칙을 동일시했으며 자연과 역사 모두가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세계를 분명히 구분한 헤겔은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 역사는 반복하는 것'으로 인지했다. 헤겔에 따르면 자연은 정체의 공간인 반면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싸움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진보의 역사이며, 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정열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이나 시저를 예로 들면서 그들의 정열은 파괴를 야기했으나 결국 세상에 이성을 확장시켰다고 명시한다. 그에 따르면 생성은 변증법적이다.
즉, 생성은 모순을 극복하면서 진행한다. 정립으로부터 반정립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진행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현실의 생성과 인간의 사유에 공통되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이성과 부조리한 세계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조리는 결국 이성에 의해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신은 생성과 융합될 것이며, 역사의 격변은 결국에 가서는 절대이성이 계획한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헤겔은 주장한다. 헤겔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관의 혁명적 성격에는 동의하였지만 역사는 의식 또는 관념의 역사라는 헤겔의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진보사관은 이념과 국익만을 내세운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더욱이 기술적 발전에 따른 여러 재앙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고 유토피아의 실현을 약속했던 사회주의 혁명 역시 거의 포기된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질문은 역사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E. H. 카는 역사밖에 있던 집단과 계급, 인민과 대륙이 역사 안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진보를 믿는 것은 결코 어떤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더 나은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진보란 무한한 것인가? 또한 진보의 그 목적은 무엇인가? 또한 역사의 진보에서 이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들의 역사인가 아니면 민중을 포함한 모두의 역사인가? 과연 중심 권력층이 말하는 진보와 주변 집단들의 진보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즈음의 현대에 들어서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물질적인 측면에서건 자유와 인권의 측면에서건 현대인의 삶이 과거 중세인들에 비해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과거 노예의 삶은 현대 노동자들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비판한다. 진보란 개념은 목적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들에 따르면 세계가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역사의 유연성을 부정한 낙관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인간은 태어남-죽음으로 귀결된 존재이므로 자신의 생존원리인 시작과 끝이라는 논리를 역사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순환이나 역사의 흐름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그것들은 반복하며 그 순환에는 일정한 규칙과 논리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인과성과 순환의 법칙이 인간의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더 나은 무엇, 본질적인 무엇을 향해 인류가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할까?
몇몇 비판론자들은 태양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한다. 쥘 르나르는 "경험, 그것은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유용한 선물"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을 통해, 과거 역사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각 세기는 우리에게 같은 형식의 전쟁과 혁명, 위기를 보여 주었다. 역사에서 표면적인 변화가 아닌 진정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역사는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의식의 결과이며 인간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변화 중에 있으며 인류의 역사 안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외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지 의심할 수 있다. 실제로 작은 관점에서 볼 때는 혼란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사건일지라도 같은 관점에서는 신기하게도 일정한 주기와 형식으로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대에 걸쳐 일어났음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가령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의 가치의 부활을 목표로 한 것은 역사의 반복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니체에 따르면 특정한 계획이나 종결점을 전제로 하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믿음이며 "인간의 목표는 시간의 종점이 아니라 최고의 인간에게서 실현된다." 즉, 그는 전체는 반복되지만 개인의 노력에 따라 그 연쇄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웅적 힘이 개인에게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니체의 초인사상이 역사의 반복성이 함축하는 운명적 비극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역사가 진보한다고 할 때의 기준은 무엇이며 역사가 반복한다고 할 때의 기준은 무엇인가? 먼저 역사가 진보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질적 발전과 인권신장을 상기한다. 반면 역사가 반복된다고 할 때는 인류가 끊임없이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지적할 때이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원리에 의해 이끌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러 시대에 걸쳐 유사한 사건들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같은 원인이 반드시 같은 결과를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인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역사는 창조와 발전의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인간이 운명을 개척할 수 있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더 이상 희망하거나 바랄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반복이나 운명이 아닌 인류의 집단적인 모험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반복하며, 인간 정신의 이성으로 비추어 볼 때 진보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의 반복, History repeats itself, Historic recurrence(역사 반복)

사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한번 일어났다는 점에서 가능 여부를 증명했으므로 충분한 세월만 주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해도 크게 이치에서 어긋나는 것은 없다. 그저 자주 보이는 패턴이 아닐 뿐.  
오늘날에는 대개 문제점이 반복될 때, "역사는 진전을 해야 하는데 실수가 반복되고 있다"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의도가 크다. 역사가 보여준 그 인과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담겨 있는 격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시기에는 역사의 발전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순환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는 문명권이 많았다. 동아시아 역시 그러했는데, 옛날의 좋은 시절이 오늘날은 변하고 와전되었으므로 다시 일으켜 옛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관념이 우세했다. 이러한 관념에서는 '역사는 반복한다'가 아니라 '반복해야 한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왕조는 정치적 문란으로 혼란에 빠진 와중에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농민 지도자가 집권한다는 시나리오가 반복된다. 이른바 요순시대가 '반복해야 할 옛 시절'의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 역시 주나라 시절의 예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중동 지역에서도 국가의 흥망성쇠를 관찰한 이븐 할둔이 "시대에 따라 국가 구성원들의 결집력(아사비야)이 낮아지기 때문에 흥망성쇠가 반복된다"라고 주장하였다.  

경제 체계에서는 호황과 불황의 반복 주기가 일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인들 역시 이런 관점에 공감하곤 한다.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좋은 일이 반복되는 거야 좋은 일이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대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이 말을 적용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겪은 실수로부터 타산지석 삼을 수도 있고, 자기가 같은 실수를 했다고 하면 당연히 더더욱 조심을 할 것 같지만 막상 닥치기 전까진 피부에 와닿지 않아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일종의 안전불감증인 셈이다. 어찌보면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안다고 말해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살면서 자기 자신이 비슷한 문제를 또 일으킬 리가 없다고 자만하기보다는 매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 

 

푸코주의자들의 반론
대표적으로 푸코주의자들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사는 단순히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단편적인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수많은 맥락들과 얽혀있는 총체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반복되는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 가령 구한말에 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이 조선에 진출하고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1990년대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등이 한반도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이 비슷한 사건이라 하여 1990년 당시 국사학계에서 구한 말 연구가 붐을 이루었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논리와 탈냉전 시대의 논리를 똑같은 사건으로 보는 것은 맥락을 무시한 단편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흐름은 비슷한 것 같아도 시대 여건에 따라 상황은 변하고, 그렇기 때문에 해결책도 옛날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회고적으로 말하는 시도 역시 역사가 진보하리라는 믿음에서 기초한 것이다. 즉,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데 (진보해야 하는데) 반복하므로 고쳐야 한다"라는 의도이다. 

좀 더 이론적인 얘기로 들어간다면, 역사의 반복성을 긍정하는 것은 곧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인 어떠한 이론이나 설명체계를 구축하여, 미래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원리로 일반화해낼수 있다는 보편주의를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사회학의 영역이지 역사학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그 사실이 발생하던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적, 경제적, 심지어 질병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의 총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 하나의 특수한 사실이다. 인간의 발전 정도가 미약하여 생활 및 문화가 거의 고정되었던 고대사의 왕조들에서조차,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전혀 개별적 특수성이 없어 보이는 보이는 왕위찬탈이라는 사건들조차 그 개개는 복잡하고 재현 불가능한 어떤 특수성을 가지고 일어난 것임을 자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땐 깨달을 수 있다. 반면, 사회학에서 가정하는 '투명한' 어떤 사회는 이러한 특수한 맥락을 획득하지 않은, 어떠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회로 정의된다.  

아래에서처럼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을 했던 카를 마르크스도 개인적으로는 역사를 일반화하여 현실의 정강으로 사용하려는 것, 또는 뉴턴의 자연법칙과 같이 현실을 예언하는 어떤 도구로 남용되어 역사의 영역을 벗어난 어떤 부문에서 소비되는 것에는 경계를 표했다.  

 

"놀라울 만큼 유사하더라도 상이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완전히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들을 따로따로 연구하고 난 후에 그것들을 비교한다면, 그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초월하는 것을 위대한 미덕으로 삼고 있는 어떤 역사철학 이론의 만능열쇠를 사용해서는 방금 말한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개인적으로 나눈 편지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경험적 자료로 파악하여 현재로 이어지는 무엇인가로 환원해낼 수 있다는 인식, 또는 과거에 일어나고 있던 일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여러 사람들의 통찰은 어째서 발생하는 것인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이,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벗어나는 거대한 피인식항, 관념적 객체라는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구성하는 요인들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을 공유하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 정말로 그 결과에 이르게 만든 세계의 전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흐름들과 모든 맥락들은 편집해서 보지 않으면, 인간이 우주의 넓음을 시각적 한계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듯이, 또는 11차원 공간을 인공지능의 도움 없이는 머릿속의 가상평면에 그려볼 수조차 없듯이, 인식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수성과 개별성을 간과하고 역사가 반복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러한 인식적 한계로 인해 현재의 상황을 과거에 투사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 방법으로만 역사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관찰자가, 관찰자의 시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현재와 역사적 사실로부터 동질성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역사학의 불멸의 고전 '로마사'를 쓴 테오도어 몸젠은 로마의 번영의 원인으로 카이사르를 지목하며, 그 전까지의 논의와 다른 관점에서 발견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키케로를 깎아내렸다. 그가 그러한 역사관을 구성하여 로마 시대에 대한 통찰에 다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로마사를 저술하던 시기 그가 몸담고 있던 독일 사회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그가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은 민족적 열망의 실현이라는 거국적 과제에 대해 뚜렷한 공감대를 모든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학적 논의에 빠져 있던 자유주의자들의 지리멸렬한 다툼과 공박으로 인해 너무나 뻔히 보이는 실행 안이 현실로 실현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만인의 자유가 허용되는 바람에 결국 누구의 의지도 실현되지 못하는 자유주의의 무정부적 속성에 대한 이해를 이러한 독일의 시대적 상황이 몸젠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독일은 곧 비스마르크 등 독재적 집권자에 의한 긴 통치 기간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연구 상황을 염두에 두고도 과연 로마의 역사적 경험이 독일에서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몸젠이 제시한 것은, 과거에 대한 연구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당시 독일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예언이었고 당시 독일 사회에 대한 통찰이었다.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이 몸젠과 같은 역사학적 탁월성을 지닌 인물에게 제공되었더라면 우리가 현재 인식하는 카이사르의 입지와 위치는 전혀 다를 수 있었다. 즉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현재를 바탕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인간의 본능적 함정과 인식적 한계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즉,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역사에 어떤 실용적인 의의를 부여하여 역사학 연구와 역사 교육 등등의 본질적 가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근대에 들어 학문적 개념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논쟁이 진화됨에 따라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부터는 각 학파와 사관 그리고 역사철학에 따라 무수히 새롭게 창조된 역사의 효용과 의의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사학과에 진학하여 교수에게 가장 처음 들을 수업내용은 '지나간 역사를 타산지석, 반면교사로 삼지 말라'는 경고라고 한다. 

상기의 반론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전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카가 제시한 '역사는 일련의 승인된 판단'이라는 말은 과거 플라톤과 대립하던 소피스트들의 '더 강한 주장과 더 약한 주장'이라는 상대주의의 악습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어, 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는 부분이다. 
 
이외에도 역사를 반복한다는 말의 뜻에는 인간의 심리를 장확하고 세밀하며 객관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사람의 인생과 삶의 종류와 급은 다양하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도 천차만별이다. 그 대상의 성격과 인식상태,정신의 상태 등을 단지 '역사는 반복된다'이 한 문장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인류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고 이해득실에 따라서 행해졌다는 것은 현대 시대를 포함해서 대부분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
키케로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븐 할둔

 

관련 명언 및 명대사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
투키디데스
Was die Erfahrung aber und die Geschichte lehren, ist dieses, daß Völker und Regierungen niemals etwas aus der Geschichte gelernt und nach Lehren, die aus derselben zu ziehen gewesen wären, gehandelt haben.
역사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는 점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의 철학에 관한 강연 중 서론》, 1832년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farce)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년
History never repeats itself, but it does often rhyme.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다만 종종 각운을 맞춘다.
마크 트웨인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한 번은 비극의 형태로, 다음에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상이한 형태의 비극들로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몇몇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들이 있으며, 그것에 비추어 볼 때 역사학은 수사학적 의미가 아닌 지극히 과학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삶의 스승"이다.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 성냥갑》
Hegel was right when he said that we learn from history that man can never learn anything from history.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헤겔은 옳았다.
If history repeats itself, and the unexpected always happens, how incapable must Man be of learning from experience.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
Toutes choses sont dites déjà ; mais comme personne n'écoute, il faut toujours recommencer
모든 것은 이미 일컬어졌으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앙드레 지드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조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 에스파냐 출신의 미국 철학자)
Whoever wishes to foresee the future must consult the past; for human events ever resemble those of preceding times. This arises from the fact that they are produced by men who ever have been, and ever shall be, animated by the same passions, and thus they necessarily have the same results.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자는 과거를 돌이킬지어다. 인간사는 선대의 그것을 닮게 되나니. 이는 그 사건들이 그때 살던 사람이든 지금 사는 사람이든 동일한 성정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그로써 그것들은 같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History, with all her volumes vast, hath but one page
역사라는 책은, 그 두께에도 불구하고 단 한 장의 페이지로 되어 있다.
조지 고든 바이런
소는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박완서, 윤문규 등,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에 대한 반박. 널리 퍼져 있기에 정확한 출처는 찾을 수 없으며, 이외수의 명언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을 비웃지 마라. 그는 지금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수
"전쟁.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바뀔 수 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서.
율리시스(폴아웃: 뉴 베가스), Lonesome Road의 엔딩에서.
"살다보면 항상 세상은 반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구세대가 경험한 실수와 성공의 사실들을 신세대들은 똑같이 답습한다. 아무리 구세대가 자신의 경험담을 신세대들에게 알려주어도. 그들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그 경험들을 애써 무시하거나 모르고 있다. 이것은 그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불필요한 진실인가? 마치 결혼 전 처녀가 양아치 같은 놈에게 눈이 멀어서 결혼을 감행하려는 것과 같은, 그녀의 부모들은 양아치의 앞날이 뻔히 보이기에 결사 말리지만 그녀는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눈앞의 달콤함에만 빠져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된다. 먼 예전 자신의 부모들이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해 주려 또 말하지만, ('집어 쳐! 난 엄마처럼 살지 않아! 난 멋지게 내 삶을 살 거니까 자꾸 내 인생 참견하지 마.') 그러나, 멋진 삶?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웃기는 소리다! 결국은 그 처녀의 딸 역시 그 처녀와 똑같이 살게 되는 인생의 비극을 맛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의 내가 삶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결과였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연장자의 경험을 인정하고 그 경험을 자신의 삶에 대비하는 자들! 결국 인생의 승리자는 그런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선, 우리 업계도 마찬가지다. 왜? 뻔히? 결과적으로…. 되지도 않을 싸움을 하려 드는가?"
김성모, 《대털 2.0》 中 류존하의 대사
지옥과 저승은 아무리 들어가도 한이 없듯이 사람의 욕심도 끝이 없다.
성경 잠언 27장 20절(공동번역)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성경 전도서 1장 9절(공동번역)
이 상소의 맺음은 부녀자에게 일을 시키고, 사치품을 금하자는 매우 엉뚱한 결론이었지만… 시대상은 현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를 알고 배우는 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언제나 말하지만 삼국지는 18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겨우 청동기 지나고, 철기를 쓰던 시대라구요. 1800년 전 사람들도 현대인들과 이리 비슷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100년 안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말할 필요도 없죠.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고, 그래서 미리 알고 있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최훈, 《삼국전투기》 中
미래에도 이미 내가 들은 것과 똑같은 주제가 다시 울려 퍼지리라. 이성적인 사람이 이성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는 미치광이가 어이없는 일과 대참사를 위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 말란 법은 없다.
조지프 캠벨, 《신의 가면 : 원시신화학》 서문에서
유행은 돌고 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Know your history, or be doomed to repeat it.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을 되풀이해 파국을 맞을 것이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의 핵심 캐치프레이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디시인사이드
인간은 반복된다.
효기심 신(新) 인트로에서
잊지 마라….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반복한다.
기프, 《가면라이더 리바이스》 46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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