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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사건,1971년,북파공작원

1971년 8월 23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1968년 ‘1·21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3년 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 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28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사태’..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서울대 제적생 4명,사법연수원생 1명,중앙정보부,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국가보안법

1971년 11월 13일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 명령을 발표한다. 그에 따라서 서울지역 7개 학교에 위수군 진주, 전남대를 비롯한 8개 대학에 휴업령, 23개 대학에서 177명 제적, 7개 대학 74개 써클 해체, 5개 대학 14종 미등록 간행물 폐간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학생운동을 비롯해 민주화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위수령이 발동된 직후 중앙정보부는 1971년 11월 13일에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구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모의했으며, 그 가운데 4명이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단체구성 위반과 형법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

사십대기수론,四十代旗手論,1971년,신민당 김영삼,김대중,이철승,삼선개헌

1971년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나설 것을 선언하며 내세운 논리.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후보지명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오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박정권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삼선개헌 강행 이후 오늘의 내외정세를 냉정히 분석하고 수많은 당내외 동지들의 의견들을 종합한 끝에 71년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김영삼은 ‘40대기수론’의 근거로 “첫째,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세력이 야당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해방 후 25년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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