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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

8·15선언, 1970년, 박정희, 닉슨독트린, 체제경쟁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대북선언.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전기를 새로이 마련하고자 대북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해온 종전의 태도를 포기한다고 대외에 공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해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를 북한이 수락·실천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둘째, 북한이 한국의 민주·통일·독립..

전태일분신사건,1970년,평화시장,근로기준법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 자살한 사건.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면서, 시다를 비롯한 여공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 침해를 체험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여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

와우아파트붕괴사고,1970년,33명 사망,무허가주택,서민아파트,부실공사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경, 마포구 창천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한 개동(제15동)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 와우아파트는 서울시의 고민이었던 무허가 건물을 줄이고, 그 대신 서민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취지 하에 건립된 아파트였다. 즉 와우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줄여나가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서민아파트 건설 계획의 하나였던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사회의 전시행정, 부정부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고였다. 건설사의 비리와 감독기관의 비리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너무 빠른 시간에, 충분하지 않은 예산으로, 그리고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의 합작에 의한, 이미 예고되어 있는 사고였다.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로 무허가 ..

오적필화사건,五賊筆禍事件,1970년,김지하,오적(五賊),사상계,필화,筆禍

필화(筆禍) 언론 매체 등에 당시의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처벌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것 1970년 6월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으로 인해 발생한 필화사건. 박정희정권 시기에는 필화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이영희필화사건’, ‘분지필화사건’ 등 다수의 필화사건이 발생했으며, 1970년대는 더욱 언론과 문인 통제를 강화하며 필화사건은 더욱 증가했다. 197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이 ‘오적필화사건’이다.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오적’이라 지칭하며, 그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을 1970년 5월에『사상계』를 통해서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는 「오적」의 유포를 막을 요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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