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947년 2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제주 4·3사건,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

여운형암살사건,1947년,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몽양(夢陽), 여운형,혜화동,한지근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 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좌우합작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