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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

포츠담선언, 1945년, 연합국 정상회담, 대일(對日) 공동선언

1945년 7월 26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 연합국 정상들은 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혔다. 역사적 배경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세 번째 전시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신탁통치반대운동,1945년,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우익 반대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여 일어난 우익 세력의 반대운동. 연합국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 등을 연쇄적으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연합국의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합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회담에서 3개국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 2차대전 내내 연합국 간에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의 제안에 소련과 영국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

부민관투탄의거,1945년,친일단체 대의당,아세아민족분격대회,조문기(趙文紀)

1945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장에, 조문기(趙文紀) 등 애국 의사들이 폭탄을 설치,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의거. 1945년 5월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정책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은 서울 관수동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들 애국청년당원들은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제거,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기 위..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한반도 신탁통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때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다. 경과 흔히 모스크바의정서 한국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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