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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회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대한인자유대회(大韓人自由大會),1919년,1942년,미국,독립운동후원대회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첫번째 대회는 일명 ‘한인자유대회’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하기 위해 열렸던 한국인의 대대적 모임이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 외교고문인 서재필(徐載弼)의 주선으로 열렸다. 상업·교육·언론·종교 등 각계의 유력한 미국인사들을 초청해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 사실을 낱낱이 선전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첫째, 임시정부를 후원한다. 둘째, 구미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한다. 셋째,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독립선언과 국내 실정을 이해시킨다. 넷째, 일본의 실책을 깨닫게 한다. 다섯째,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한다.” 등이었다. 대회가 끝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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