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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

사도하자전투,1933년, 한·중연합군

1933년 4월 한·중연합군이 일·만연합군을 격파한 전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중앙 회의를 개최하고,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합작하여 연합 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해 12월 경박호(鏡泊湖)에서 첫 번째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뒤 사도하자에 주둔하며 병사 모집과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1933년 4월 연합군의 군세가 증강되어 가고 있음을 탐지한 일본군과 만주군의 연합 부대는 사도하자를 공격하였다. 이때 한·중연합군은 이 기회에 일·만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전군을 4개 부대로 편성하였다. 제1로군은 소수 정예부대로 구성하여 적을 유인하도..

동녕현전투,1933년,한국 독립군,중국 의용군,동만주 동녕현성

1933년 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중국 공산당 계열의 혼춘(琿春)·왕청(汪淸) 유격대 등과 연합, 동만주 동녕현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략한 전투. 지청천(池靑天)·조경한(趙擎韓) 등이 거느리는 500여 명의 한국 독립군은 6월 말 간도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스스잉(柴世榮)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하순경 스스잉부대가 우이청(吳義成) 휘하로 통합된 뒤 한국 독립군도 우이청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부대와 연대하게 되었다. 중소국경 지대에 있는 동녕현성에는 500여 명의 일본군과 1,500여 명의 만주국군, 기타 다수의 관헌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치·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일·만군의 군수품이 다량 비축되어 의용군과 독립..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1933년,한국 독립군,한중연합

1933년 6월 한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 점령 하의 동경성(東京城)을 탈환한 전투.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은 1932년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사령관 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총사령관 정초(丁超)와 협의한 뒤 한·중 연합군인 중한연군(中韓聯軍)을 조직하였고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였다. 각지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3년 4월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일·만연합부대 1개 사단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영안현성(寧安縣城)을 점령할 계책으로 6월 3일 전 병력을 동원해 공격하기로 하였다. 기병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동모란강(東牡丹江) 부근의 산간으로 진격해 적의 후방 부대를 공격하게 하고..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1933년,지청천,한국독립군,중국군 연합 작전

1933년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중국호로군 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2년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동경성전투 이후 한국독립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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