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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투탄의거, 훙커우공원의거,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투탄의거.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한 뒤 전승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비밀항일결사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인 윤봉길이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요인을 폭살시켰다. 당시 사상자는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郎),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등과 다수의 간부들이었다. 이 중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은 뒤 5월 24일 사망하였고 가와바타는 즉사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받아..

쌍성보전투,1932년,한국독립군,중국의용군,하얼빈

1932년 9월 20일과 11월 17일에서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1차 전투에서는 대승했으나, 2차 전투에서는 패전하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산하 한국독립군은 난관을 겪으면 서도 북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 반만의용군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설치..

이봉창 투탄의거,일본천황암살미수사건,사쿠라다문의거,1932년,한인애국단, 김구, 이봉창, 히로히토 일본천황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경, 한인애국단원(韓人愛國團員)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궁성 사쿠라다문을 나서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를 죽이려 했던 거사. 1931년 9월 군국주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는 남만주를 거점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우리의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계획된 행동으로, 자금 부족과 내부 분규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최후의 비상 대책을 세워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즉, 적은 경비와 인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의열 투쟁이었다. 경과 실행 책임자인 김구(金九)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적임자를 물색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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