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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2

학생전위동맹사건, 1929년, 광주 학생,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 이후,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생전위동맹을 중심으로 서울 시내 각 학교의 격문사건과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을 벌인 사건. 학생전위동맹은 1926년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학생혁명당(學生革命黨)의 후신으로 1929년 3월 하순에 개칭된 비밀결사이다. 학생전위동맹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29년 11월 7일부건(夫鍵)·권유근(權遺根) 등을 광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장석천(張錫天)·강영석(姜永錫) 등과 회합하고 광주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검거당한 학생의 석방과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선 서울시내 각 중등학생을 움직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여세를 몰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

원산총파업, 1929년, 노동조합원 2,200여 명, 일제시대 최대 규모 파업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이었다. 당시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있었는데, 그 지배인과 주요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조선인 노동자들을 민족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타마(兒玉)라는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는데, 1928년 9월 초 또 다시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20여일이 지난 후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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