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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

형평운동(衡平運動), 1923년, 백정(白丁), 신분 해방 운동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정책을 펴,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했다. 때문에 당시 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했으며,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또한 그대로 존속되었다. 당시 백정의 수효는 형평사 통계에 의하면 40여 만명이었고,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 이들은 일부가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본업이라 할 ..

종로경찰서투탄의거, 1923년, 의열단, 김상옥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경 폭탄이 경찰서 서쪽 경무계 사무실에서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 투탄에 성공한 김상옥은 그날 밤으로 삼파동(三坡洞)주 01)에 있는 매부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일본경찰에 포위되었다. 이 곳에서 총격전을 전개하여 형사부장 마에무라(前村)를 비롯하여 우메다(梅田)경부 등을 저격한 뒤 왕십리를 거쳐 효제동으로 도주, 은신하였다. 그러나 22일 다시 은신처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치열한 총격전을 3시간 동안 전개하다가 마지막 남은 총탄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동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

암태도소작쟁의,1923년,소작농민항쟁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소작농민항쟁.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에 걸쳐 암태도의 식민성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해 소작쟁의를 벌였다.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1920년대에는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와 전라북도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암태도에는 1923년 쟁의 발발 당시 약 140정보[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이들 소유지를 마름의 감독으로 경영하였다.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 경비를 공동부담으..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1923년,관동대지진,한국인,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경시청(警視廳)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

국민대표회의, 1923년, 상해 임시정부, 창조파, 개조파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의 대표회의. 당시 임시정부는 내부적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부터 각지의 국민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협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2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 개최되었다.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장한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 등의 촉진선언문이 상해에서 발표되고, 그해 4월북경의 군사통일회가 적극적으로 소집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각지의 동포들로부터 호응 속에서 마침내 국민대표회의주비회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은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에 걸친 태평양회의 및 극동인민대표대회로 인해 조금 늦추어졌다. 그러나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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