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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

청산리 대첩, 1920년,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

어랑촌전투,1920년,김좌진,홍범도,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22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어랑촌 일대에서 김좌진·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중 최대 규모의 전투. 1920년 10월 22일 새벽 천수평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 기병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동지대의 예비대를 투입하고, 중포병 부대의 포병 화력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다. 김좌진 부대는 지리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담이 가중되어 전장을 이탈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이 어랑촌 전투에 가담하니 일본군의 공격이 분산되..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1920년,의열단,박재혁(朴載赫),진영사건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義烈團員)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 의열단에서는 1920년 초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 등으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히자 이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무역상인으로서 싱가포르에 와 있던 단원 박재혁을 상해(上海)로 소환하여 부산경찰서장을 죽일 것을 지시하였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초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였다. 그는 상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탐지, 많은 중국고서를 사들여서 고서상으로 위장하였으며, 그 고서더미 속에 폭탄과 전단(傳單)을 감추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9월 13일 고향인 부산에 도착하..

백운평전투,1920년,길림성,청산리 독립전쟁 최초 전투

1920년 10월 21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 1920년 10월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안도현으로 이동 중이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 오자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에 백운평 인근 골짜기 길목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허위 정보를 흘렸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경 일본군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지휘하는 선발 보병 1개 중대가 매복한 지점까지 접근하자 독립군들은 기습적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의 증원을 받아 계속 독립군을 공격하였으나 독립군이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후 매복에 참여..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1920년,최수봉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崔壽鳳)이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폭탄을 던진 의거. 최수봉은 당시 나이 24세로서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 거주하는 김상윤(金相潤)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고 응낙하였다. 이에 김상윤은 최수봉을 대구부(大邱府) 근처에 거주하는 김원석(金元錫)에게 소개하였다. 김원석은 최수봉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하여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경관을 살해할 것을 지시, 12월 26일 그에게 폭탄 2개를 줌으로써 이튿날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최수봉은 먼저 서장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서원들이 모여 있던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창문 밖에서 폭탄 1개를 던졌다. 이 ..

고동하전투, 1920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홍범도, 대한독립군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5일 밤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가 추격 중인 일본군 부대를 격퇴한 전투. 1920년 10월 18일부터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동(東)지대와 계속해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독립군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수립한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일본군의 탄압 지역 밖에 있는 안도현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이동하였다. 25일 고동하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 부대 300여 명 및 김좌진 부대 예하의 약 30여 명이 함께 숙영하고 있었다.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이날 밤 10시경 고동하 계곡에서 숙영 중인 독립군의 흔적..

경신참변(庚申慘變), 1920년, 간도 학살, 혼춘사변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한ㆍ만 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독립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독립군 부대는 만주로 망명해 오는 애국 청년을 포섭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모금된 국민들의 의연금으로 시베리아로부터 대량의 최신식 무기를 구입함으로써 급속히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그 결과 독립군 부대는 부단히 한ㆍ만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 일본 군경과 전투를 전개하고, 또 일본의 식민 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본은 중국 정부를 위협해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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