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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사건,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원 체포

1919년 6월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 대거 체포되었던 사건. 조선국권회복단은 단군(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이 시회(詩會)를 연다고 가장하고, 경북지방의 유림들을 포섭, 항일운동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통령(統領)에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에 홍주일(洪宙一), 문서부장에 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 권유부장에 김규(金圭), 유세부장에 정순영(鄭舜永), 결사부장에 황병기(黃炳基) 등으로 구성되었다. 활동..

사이토저격의거,1919년,강우규,사이토 암살,조선총독암살기도,노인동맹,대일폭력투쟁노선

1919년 9월 2일 강우규(姜宇奎)가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오던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로 한국민을 철저히 탄압하였는데, 그 결과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파면하고, 사이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현역 해군 대장인 사이토는 부임하기 전에 이미 한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내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경과와 결과 국권 상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각지를 전전하던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층 지사들이 조직한 노인동맹(老人同盟)에 가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사이토 신임 총독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

대한인자유대회(大韓人自由大會),1919년,1942년,미국,독립운동후원대회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첫번째 대회는 일명 ‘한인자유대회’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하기 위해 열렸던 한국인의 대대적 모임이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 외교고문인 서재필(徐載弼)의 주선으로 열렸다. 상업·교육·언론·종교 등 각계의 유력한 미국인사들을 초청해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 사실을 낱낱이 선전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첫째, 임시정부를 후원한다. 둘째, 구미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한다. 셋째,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독립선언과 국내 실정을 이해시킨다. 넷째, 일본의 실책을 깨닫게 한다. 다섯째,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한다.” 등이었다. 대회가 끝날..

2·8독립선언,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 조선청년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는 1918년 11월 만주·러시아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는 「2·8독립선언서」, 셋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특색이 있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미 한말 때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간행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1910년 망국 이후에는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회원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조선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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