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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

한일의정서, 1904년, 조일공수동맹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 러·일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 양국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일 양국은 이 해 2월 6일 국교를 단절, 2월 8일여순(旅順)항에서 처음 포성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고, 2월 10일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여, 한국 정부로서는 국외중립을 견지할 방도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동시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

선교약조(宣敎約條),1904년,플랑시,이하영,교민약조,교민화의약정

1904년에 주조선 프랑스 공사 플랑시(Collin dePlancy)와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사이에 체결된 조약. 한불수호조약 이후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그 결과 교인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선교사와 지방관료 및 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어 한불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이른바 교안(敎案)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1889년에 교민약조(敎民約條)를, 1901년에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을 체결한 데 이어, 1904년 6월 9일자로 다시 선교약조를 체결하였다. 현재 약조서(約條書)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그해 6월 6일자 『제국신문(帝國新聞)』에 8개 조목의 내용만이 보도되어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은 “프랑스선교사들은 한국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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