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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3

행주대첩, 임진왜란, 1593년, 권율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

진주전투, 임진왜란, 1592년, 1593년, 김시민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

벽제관전투,임진왜란,1593년,벽제관(경기도 고양 역관),명나라, 일본군,여석령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던 역관)에서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과 조선 관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대패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은 황해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다. 이때 개성수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는 끝내 사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철수권유 때문에 퇴각하기는 했으나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다치바나(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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