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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9

평양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이여송, 고니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즉,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

진주전투, 임진왜란, 1592년, 1593년, 김시민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

웅치전투,1592년,임진왜란,이복남,황박,정담,변응정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이복남(李福男) 등이 웅치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은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은 7월 8일 군대를 연합하여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세한 대대적인 왜군의 재차 공세를 받아 우리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포위되어 모두 죽었다. 전주를 보수(保守)함에 있어 이들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우리 군사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금산전투,임진왜란,1592년,의병장 고경명,조헌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부터 8월 사이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두 차례의 전투.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주 01)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했다. 이 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

북관대첩,1592년,임해군,정문부,가토 기요마사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부산포해전,1592년,임진왜란,이순신,원균,정운,이언량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

부산진전투,1592년,정발(鄭撥),고니시(小西行長)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정발(鄭撥) 등이 부산진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 휘하의 1군(軍) 1만 8,700여명의 일본군은 400여척의 병선으로 신시(申時)주 01)에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그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은 전선 3척을 이끌고 포구를 나섰으나 적선은 이미 절영도(絶影島) 내외양에 들어와 있었다. 정발은 일진일퇴하면서 진성(鎭城)으로 들어와 동문루(東門樓) 앞에서 급히 군민을 소집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적장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약간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성의 동정을 살피기도 하였으나 이 날 적군은 상륙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적군은 우암(牛巖)쪽에서 상륙하여 성으로 향하고 세 방면에서 성을 공격하였..

동래전투(東萊戰鬪),1592년,선조,송상현,소서행장,동래성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송상현 등이 경상도 동래에서 일본군과의 싸운 전투. 동래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을 지키던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함락당한 전투이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등과 수많은 군사·백성이 전사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3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에 침입하였다.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동래성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적군은 3대(隊)로 나누어 ..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임진왜란,1592년,이순신(李舜臣),고성(固城) 당항리,원균,이억기,어영담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이순신(李舜臣) 등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 ① 제1차해전 : 1592년(선조 25) 6월 앞서 있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음을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1척으로 공격,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賊首)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② 제2차해전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見乃梁)과 증도(甑島)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에게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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