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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 2

정미약조, 1547년, 명종, 일본 국교 허용

1547년(명종 2) 조선이 3년 전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호족들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의 내란기로 국내가 혼란해지자 왜구들이 다시 일어나 왜인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경남 통영시 원량면 진동)에 쳐들어와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 내왕을 금하였다.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했으며 조정에서는 통교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으로 맞섰다. 문제는 왜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국왕사(國王使)의 통교만을 허용하고 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정미사화,을사사화,1547년,명종,윤원형, 윤임

양재역벽서사건은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1547년(명종 2) 9월 경기도 과천 양재역(良才驛)에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락하고 있다는 내용의 벽서가 발견되었다. 이기 등은 이러한 벽서를 붙인 것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잔당이 행한 짓이라며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결국 대윤(大尹)의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 등이 사형당하고, 권발(權撥), 이언적(李彥迪), 정자(鄭磁),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였다. 윤씨 집안의 피 터지는 싸움 중종은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한 뒤 반정을 주도했던 윤임(尹任)의 여동생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 결혼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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