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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5

홍범도, 빨치산, 대한독립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독립군 부대 암기

●독립군 부대 암기 - "234 대한조한조 독독혁광의" 3.1운동 19 만주사변 31 난징학살 37 1920 1930 1940 대한독립군 홍범도 3부 → 한국독립군 지청천 조선의용대 김원봉 → 한국광복군 김구 조선혁명군 양세봉 조선의용군 김두봉 ● 대한독립군(1919.12) ▪홍범도 ▪북간도 왕청현/봉오동 근거지 ▪봉오동 전투(1920.6), 청산리 전투(1920.10) ▪봉오동 전투에서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과 연합 대한북로독군부 편성 ●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 1930. 7) ▪지청천/홍진 등 ▪북만주 ▪3부에서 나눠진 혁신의회 기반 한국독립당 조직, 예하에 한국독립군 편성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 - 쌍성보 전투(1932), 경박호 전투(1933), 사도하자 전투(1933), 동..

잡스 한국사 2023.08.30

청산리 대첩, 1920년,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

어랑촌전투,1920년,김좌진,홍범도,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22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어랑촌 일대에서 김좌진·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중 최대 규모의 전투. 1920년 10월 22일 새벽 천수평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 기병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동지대의 예비대를 투입하고, 중포병 부대의 포병 화력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다. 김좌진 부대는 지리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담이 가중되어 전장을 이탈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이 어랑촌 전투에 가담하니 일본군의 공격이 분산되..

고동하전투, 1920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홍범도, 대한독립군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5일 밤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가 추격 중인 일본군 부대를 격퇴한 전투. 1920년 10월 18일부터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동(東)지대와 계속해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독립군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수립한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일본군의 탄압 지역 밖에 있는 안도현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이동하였다. 25일 고동하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 부대 300여 명 및 김좌진 부대 예하의 약 30여 명이 함께 숙영하고 있었다.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이날 밤 10시경 고동하 계곡에서 숙영 중인 독립군의 흔적..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1920, 홍범도, 독립군 최초 대승리, 봉오동전투

1920년 6월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1920년 6월만주에 근거를 두고 항일전투를 전개하던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 휘하의 독립군은 두만강을 도강하여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소대를 격파한 독립군은 일몰 후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삼둔자(和龍縣三屯子)로 귀환하였다. 한편, 독립군의 기습작전으로 패배한 것을 안 일본군 39사단장은 곧 야스가와(安川)소좌의 1개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이 때 독립군사령부에서는 일본군 추격대를 안산(安山)촌락 후방까지 유인한 뒤 6월 6일 오후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사살 120명, 중상 200명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아울러 소총 160자루, 기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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