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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2

안중근, 이토히로부미,이토포살의거,1909년 안중근,하얼빈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한 의거. 이토는 1905년 11월 특파대사로 서울에 와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다음 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조직하여, 정치·외교뿐만 아니라 재정·금융·화폐·체신·교통 등 제분야를 장악하여 조선의 식민지화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 반일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한 뒤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렸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병탄작업은 이토에 의해 완결되었 형식적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래서 주권회복을 원하는 한국인들은 통감..

쌍성보전투,1932년,한국독립군,중국의용군,하얼빈

1932년 9월 20일과 11월 17일에서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1차 전투에서는 대승했으나, 2차 전투에서는 패전하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산하 한국독립군은 난관을 겪으면 서도 북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 반만의용군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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