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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성의 치 3

여태후, 묵돌선우, 평성의 치, 성희롱

기원후 1세기 쯤이라면 욱일승천하며 한나라를 쥐락펴락했던 흉노가 한무제의 반격을 받고 북으로 북으로 쫓겨난 시기였다. 흉노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년~기원전 100년 사이였다. 흉노는 특유의 기마전법으로 진나라 말~한나라 초 어지러운 중원의 상황에 힘입어 강성해졌다. 특히 두만 선우(?~기원전 209)에 이어 정권을 잡은 묵특(돌) 선우(기원전 209~174)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 고조도 묵돌선우에게 무릎을 꿇고만다. 즉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02년 겨울, 한고조 유방은 흉노 묵돌선우의 계략에 말려 평성(산서성 대동시·山西省 大同市)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한다. 이것이 중국역사가 일컫는 ‘평성의 치욕’이다. 한나라는 흉노의 계속된 침략에 ‘한..

왕소군, 중국 4대 미녀, 흉노, 평성의 치

王昭君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로,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한야 선우와 결혼한 시기 등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정할 뿐이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또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녕호 연지(寧胡 阏氏)로 봉했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

평성의 치, 백등산 포위전, 흉노 묵특선우, 한 유방

백등산 포위전(한국 한자: 白登之圍 백등지위)은 기원전 200년 전한과 흉노 사이에 발생한 군사 충돌이다. 한고조는 흉노를 복속시키기 위해 그 영토를 침공했지만 묵돌 선우의 반격에 오히려 백등산(白登山)에 고립당했다. 고조는 7일간 버티다가 모사 진평의 계책으로 묵돌 선우의 왕비에게 뇌물을 주어 포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달아났다. 이후 한나라와 흉노는 형제 관계의 화친을 맺었다. 서초왕 항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한 황제 유방(유방)은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한왕 신을 대(代) 땅으로 파견했지만, 한왕 신은 흉노와의 평화를 주장했다.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자 한왕 신은 흉노에 투항했고, 한왕의 군대가 더해진 흉노 4만 대군이 태원(太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조는 32만 군대를 거느리고 평성(平城)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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