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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2

우금치전투,1894년,동학농민군,전봉준, 손병희, 모리야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른 전투. 삼례에서 제2차로 기포한 전봉준(全琫準) 등 남접과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孫秉熙) 등 북접은 협력해 충청감영 소재지이며 서울로의 북상 길목인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0월 9일논산에서 합류한 4만 명의 양측 주력부대는 노성(魯城)을 거쳐 공주에서 30리 떨어진 경천(敬川)에 주둔하였다. 여기에는 낙오한 청군(淸軍)도 40∼50명 가량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해 구상조(具相祖)·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리청(經理廳) 병정과 장용진(張容鎭) 등의 통위영(統衛營) 병정을 중심으로 한 관군 810명과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이 지휘하는 감영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부여와 논산 양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작전계..

고부민란,1894년,고종, 조병갑,전봉준, 동학 운동 시발점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 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농민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고,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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