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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6

김여물(金汝岉), 임진왜란, 탄금대

조선전기 충주도사, 담양부사, 의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평산 출신. 선공감정 김약균(金若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주목사 김수렴(金粹濂)이고, 아버지는 찰방 김훈(金壎)이며,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부사 강의(康顗)의 딸이다.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높은 벼슬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 담양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

권율(權慄), 임진왜란, 도원수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장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 의병장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

행주대첩, 임진왜란, 1593년, 권율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

평양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이여송, 고니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즉,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

탄금대전투, 임진왜란, 신립, 김여물, 충주, 조령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1592년 4월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해 돌아왔다. 이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진주전투, 임진왜란, 1592년, 1593년, 김시민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

이치전투,임진왜란,금산,이치,황진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황진(黃進), 권율(權慄) 등이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당시에 아군은 전라도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500명이었고, 일본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6번대소속의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전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

웅치전투,1592년,임진왜란,이복남,황박,정담,변응정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이복남(李福男) 등이 웅치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은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은 7월 8일 군대를 연합하여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세한 대대적인 왜군의 재차 공세를 받아 우리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포위되어 모두 죽었다. 전주를 보수(保守)함에 있어 이들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우리 군사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안골포해전,임진왜란,이순신,원균,이억기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에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왜란이 발발한 그해 7월 8일 이순신은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합세해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장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일본 전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일본 전선들은 모두 4..

금산전투,임진왜란,1592년,의병장 고경명,조헌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부터 8월 사이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두 차례의 전투.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주 01)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했다. 이 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

사천해전,이순신,원균,나대용,이설,임진왜란,거북선 처음 실전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이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본영(여수)을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元均)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곤양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격파하였다. 그 때 사천선창에는 왜선 12척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열박(列泊)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때마침 조수가 나가 전선의 활동이 좋지 못함을 판단하고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세워 퇴각할 기세를 보이게 하자, 적들은 외양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순신은 조수가 밀려드는 것을 계기로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적함대..

이순신 해전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1차 출동 01. 옥포해전 (1592.05.07) 02. 합포해전 (1592.05.07) 03. 적진포해전 (1592.05.08) 2차 출동 04. 사천포해전 (1592.05.29) 05. 당포해전 (1592.06.02) 06. 1차 당항포, 진해해전 (1592.06.05) 07. 율포해전 (1592.06.07) 3차 출동 08. 한산도대첩 (1592.07.08.) 09. 안골포해전 (1592.07.10) 4차 출동 10. 장림포해전 (1592.08.29) 11. 화준구미해전 (1592.09.01) 12. 다대포해전 (1592.09.01) 13. 서평포해전 (1592.09.01) 14. 절영도해전(송도) (1592.09.01) 15. 초량목해전 (1592.09.01) 16. 부산포해전 (1592.09.0..

잡스 한국사 2021.04.06

부산포해전,1592년,임진왜란,이순신,원균,정운,이언량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

벽제관전투,임진왜란,1593년,벽제관(경기도 고양 역관),명나라, 일본군,여석령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던 역관)에서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과 조선 관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대패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은 황해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다. 이때 개성수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는 끝내 사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철수권유 때문에 퇴각하기는 했으나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다치바나(立..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임진왜란,1592년,이순신(李舜臣),고성(固城) 당항리,원균,이억기,어영담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이순신(李舜臣) 등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 ① 제1차해전 : 1592년(선조 25) 6월 앞서 있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음을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1척으로 공격,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賊首)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② 제2차해전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見乃梁)과 증도(甑島)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에게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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