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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

정묘호란,1627년,인조,후금(後金)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인조,척화배금(斥和排金),청 2차 침입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

강빈옥사(姜嬪獄事), 1646년, 인조, 소현세자(昭顯世子) 빈 강씨(姜氏)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인 강씨(姜氏)가 사사된 사건. 이 사건은 부군인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벌어진 일이다. 강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1627년 가례를 올렸다. 병자호란 후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있으면서 본국의 반청명분론(反淸名分論)과 달리 현실적으로 처신할 수밖에 없었으며, 상당히 친청적인 태도를 띠게 되었다. 또, 세자 내외는 심관(瀋館)에서 영리 행위를 하여 과도한 축재를 하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의구심을 가졌고 여기에 강빈과 반목하고 있던 후궁 조씨(趙氏)의 참언이 작용하였다. 또한, 당시의 세도가 김자점(金自點)이 일반적인 반청론을 누르고, 후궁 조씨와 연결하여 인조의 총애를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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