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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4

정읍발언, 1946년, 단독정부, 이승만

1946년 정읍에서 단독정부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이 발..

사사오입개헌,1954년,이승만,3선제한 철폐,제2차 헌법개정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1952년의 발췌개헌(拔萃改憲)을 통하여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함으로써, 이 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의 중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중임하기 위하여 헌법의 장애요소를 제거할 필요를 느낀 자유당과 이승만은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재선(再選)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만 있을 뿐인 이 3선금지조항을 고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서 자유당은 그와 같은 개헌의 복안을 가지고,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 이를 찬성, 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여 많은 당선자를 확보하였다. 또한 ..

반공포로석방,1953년,이승만,휴전회담

1953년 6월 18~19일 당시 부산, 광주, 논산 등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하에 반공포로 3만 5천여 명을 탈출시킨 사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휴전조건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때까지 한국정부는 유엔군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진전이 있을 때에는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다. 휴전협정이 성립될 가능성이 짙어진 1953년 4월 이후부터는 한국의 휴전반대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휴전회담 재개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성명을 통해 평화수립 전제조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북괴 반역군의 무장을 즉시 해제시킬 것, ② 한국 영토로부터 중공군은 즉시 철수할 것, ③ 국제연..

5·10 총선거, 1948년, 제헌국회, 이승만, 김구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1947년 8월 12일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국제연합 총회 제2일에 마샬(Marshall,G.C.) 국무장관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 21일에 총회 운영위원회가 총회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통과시키고, 23일 잇따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을 통과시킴에 따라, 총회 제1차(정치)위원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부의, 심의되었다. 이 정치위원회에서 미국측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국제연합임시위원단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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