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이순신 4

안골포해전,임진왜란,이순신,원균,이억기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에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왜란이 발발한 그해 7월 8일 이순신은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합세해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장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일본 전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일본 전선들은 모두 4..

사천해전,이순신,원균,나대용,이설,임진왜란,거북선 처음 실전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이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본영(여수)을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元均)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곤양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격파하였다. 그 때 사천선창에는 왜선 12척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열박(列泊)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때마침 조수가 나가 전선의 활동이 좋지 못함을 판단하고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세워 퇴각할 기세를 보이게 하자, 적들은 외양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순신은 조수가 밀려드는 것을 계기로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적함대..

부산포해전,1592년,임진왜란,이순신,원균,정운,이언량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

명량대첩,정유재란,1597년,선조,이순신,명량(울돌목)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