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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김일손,유자광,훈구파,사초문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폐비윤씨사사사건, 성종, 폐비윤씨, 정의왕후, 소혜왕후, 연산군

조선 성종의 계비 윤씨가 부덕한 소치로 폐비가 되고 그 뒤 사약을 받아 죽은 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이 해 세자 융(0xF92C : 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매우 심해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에 비상(砒霜)을 숨겨 왕과 왕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嬪)으로 강등되려는 수모를 겪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해 이 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 연산군, 진성대군 이역

조선 제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이역(晉城大君 李懌)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다. 이로써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한 훈구세력은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권귀화(權貴化)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 1504, 훈구사림파, 성종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 임사홍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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