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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4

신민회, 신간회

신민회, 신간회 신민회 (1907-1911) 신간회(1927-1931) ①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김구 신채호 양기탁 ② 안창호 : 대성학교(평양) 건립 이승훈 : 오산학교(정주) 건립 ③ 태극서관(대구) 건립 ⇨ 국민계몽 ④ 자기회사(평양) 건립 ⇨ 산업진흥 ⑤ 공화주의 정치주장 ⑥ 105인 사건(1910.12)으로 해산(5년간 존속) ⑦ 특히 해외의 독립군기지 건설에 주력(내면적) ⑧ 후신 ⇨ 흥사단(미국L.A. 1913) 신민회 4대 강령 1.국민에게 민족의식·독립사상 고취 2.동지의 발견·단합으로 국민운동 역량 축적 3.상공업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 증진 4.교육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① 長 : 이상재 ② 3大 강령 기회주의 배격 단결을 공고히 할 것 정치적·경제적 ..

이회영(李會榮), 신민회, 항일구국연맹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키워드 교육진흥운동가 상동청년학원 무정부주의자 항일구국연맹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1910년,안명근(安明根),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신민회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이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사살하려던 항일투쟁. 1910년 10월 1일부터 위압을 떨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이 의거를 계기로 105인 사건을 일으켜 민족지도자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 등을 전국에 수배, 일제히 검거하였다. 경과와 결과 이 의거에 주동적 임무를 띤 안명근은 종형 안중근(安重根)의 쾌거를 본받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안씨 일족에 대한 감시가 혹심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동지를 규합하여 총독 등 일제의 침략 수뇌부를 폭살, 제거할 계획을 수립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한 뒤 서간도에 잠시 이주하였다. 그 일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건립하여 무장독립군을 양성할 원대한 계획도 병행시..

105인사건(百五人事件), 1911년, 신민회, 테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 안명근사건

1911년 일제가 저항적인 민족주의 및 기독교계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테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최후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 1910년을 전후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이 뿌리 깊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배일적 신문화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힌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을 확대·날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서북 지방의 배일 기독교인과 신민회원을 다수 체포한 것이 안악 사건(安岳事件)과 백오인 사건, 즉 신민회 사건이었다. 경과와 결과 안명근은 안중근(安重根)의 종제로 황해도 신천 사람이었다. 북간도로 망명해 신천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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