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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2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단종,수양대군,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사육신(死六臣)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이어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 수가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왕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4..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수양대군,황보인,김종서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은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 1441년(세종 23)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洪氏)·양씨(楊氏)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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