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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6

이탕개의 난,1583년,선조,회령,여진족

1583년(선조 16) 이탕개를 중심으로 회령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일으킨 반란. 세종대의 육진 개척으로 동북 지방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대체로 큰 문제가 없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중종 이후 내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차츰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여진족이 준동하기 시작해, 자주 국경을 침범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해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한 출병론(出兵論)이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반대론자에 의해 실행되지 못하고 계속 소극적인 회유책으로 일관해 오던 중 1583년 마침내 ‘이탕개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탕개는 선조 초 우리 나라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였다. 158..

명량대첩,정유재란,1597년,선조,이순신,명량(울돌목)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

동래전투(東萊戰鬪),1592년,선조,송상현,소서행장,동래성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송상현 등이 경상도 동래에서 일본군과의 싸운 전투. 동래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을 지키던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함락당한 전투이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등과 수많은 군사·백성이 전사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3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에 침입하였다.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동래성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적군은 3대(隊)로 나누어 ..

노량해전(露梁海戰),정유재란,1598년,선조,이순신(李舜臣),진린(陳璘),조·명 연합함대,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이순신 전사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정여립, 동인, 서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

건저문제, 建儲,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1591년, 선조, 왕세자 책봉, 동서분당, 정철, 정여립

1591년(선조 24)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분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 건저, 즉 왕세자 책봉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신묘년(辛卯年)의 시사(時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왕비의 소생인 원자(元子)가 없었고, 다만 후궁 소생의 왕자만이 있었으므로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이 건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정철(鄭澈)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부제학 이성중(李誠中), 대사헌 이해수(李海壽) 등과 같이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또, 정철은 이 건저 문제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에게도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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