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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4

인조반정,1623년,광해군,이귀,서인,이이첨,대북파,능양군 종(綾陽君倧)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주 02)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주 03)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정여립, 동인, 서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숙종,인현왕후,소의 장씨(昭儀張氏),서인,남인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숙종,남인,서인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사촌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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