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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5

삼국통일,7세기 중엽,신라,백제,고구려,통일정부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1) 삼국의 항쟁 삼국의 분립은 성읍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에게는 국력을 다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각기 숙원사업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고대국가에 있어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제국들은 대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먼저 민족을 통일하고, 그 통일된 힘으로 주위를 위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싸운 것이나 서로 동맹을 맺고 한쪽을 공격한 것, 주위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들도 모두 우선은 자신을 보존하고, 나아가 민족을 통일하려는 궁극적인 목적..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642년,선덕여왕,신라,백제,의자왕,윤충,김품석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640년대 접어들면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주 02)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전투는 이러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한 사건이었다. 경과 642년 8월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인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재지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재지세력들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

나제동맹(羅濟同盟),433년,신라,백제,고구려남진정책,비유왕,눌지왕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동맹. 최초 나제동맹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초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요동(遼東)방면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의 팽창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당시 북진정책을 전개하고 있던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한편,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호(和好)를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관계는 형제관계처..

관미령전투,387년,진사왕,백제,말갈,청목산,청석동

387년(진사왕 3)에 있었던 백제와 말갈(靺鞨)의 싸움. 백제는 개국 초기부터 동예(東濊)로 추정되는 말갈의 부단한 침입을 받아왔다. 387년 백제군은 말갈군의 침입을 관미령에서 방어하다가 패하였다. 관미령의 위치에 관해서는 서기전 9년(온조왕 10) 말갈군을 곤미천(昆彌川)에서 방어하다 패한 백제군이 청목산(靑木山)으로 후퇴한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청목산을 개성 송악산이라 했다. 이는 백제 초기의 영토상태로 보아 근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송악산 수십리 북쪽에 있는 청석동(靑石洞) 부근을 청목산으로 비정하는 게 더욱 적절하다. 청석동은 역사적으로 남북교통로요, 오래된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있는 곳이다. 청목산 혹은 청목령을 청석동으로 비정한다면, 곤미천..

관산성전투,554년,백제,신라,옥천,나제동맹결렬,성왕전사

554년에 관산성(管山城)에서 백제와 신라가 싸워 백제가 대패한 전투.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지방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함산성(函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5세기 중엽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웅진(熊津)주 01)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시대 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501∼523)대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되어갔고, 성왕(聖王, 523∼554)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비(泗沘)주 02)로의 천도(遷都)가 단행되었다. 사비천도를 전후해 성왕은 내외의 제반 통치제도와 불교교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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