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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평전투 2

김좌진(金佐鎭), 청산리대첩,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일제강점기 만주의 청산리대첩(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

백운평전투,1920년,길림성,청산리 독립전쟁 최초 전투

1920년 10월 21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 1920년 10월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안도현으로 이동 중이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 오자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에 백운평 인근 골짜기 길목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허위 정보를 흘렸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경 일본군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지휘하는 선발 보병 1개 중대가 매복한 지점까지 접근하자 독립군들은 기습적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의 증원을 받아 계속 독립군을 공격하였으나 독립군이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후 매복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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