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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

8·15선언, 1970년, 박정희, 닉슨독트린, 체제경쟁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대북선언.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전기를 새로이 마련하고자 대북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해온 종전의 태도를 포기한다고 대외에 공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해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를 북한이 수락·실천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둘째, 북한이 한국의 민주·통일·독립..

5·16군사쿠데타,1961년,박정희,김종필,정군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5·16은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국내적 배경은 또한 군 내부 배경과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통한 군부의 급속한 비대화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 10만여 명 내외에서 60만 명 이상으로 확대된 군부는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았는가 하면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어 여타 사회 분야에 비해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화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

6·23선언, 평화통일외교정책에관한특별선언, 1973년, 박정희, 공산권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국정부의 정책선언. 한국정부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을 천명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이후 비동맹국가들이 늘어나고 유엔에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유엔의 기존 중국 대표였던 중화민국이 경질되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교체되자 유엔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유엔 외교가 강화되고 상주대표부 개설, 유엔 산하기구 및 전문기구 가입 등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제 한반도 문제가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 현실에서 한국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서방권 일변도..

삼선개헌,1969년,제3공화국,박정희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문호를 열어 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이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① 대통령의 3선연임 허용, ② 국회의원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겸직 허용, ③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④ 국회의원 정수 증가 등이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규정이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2차까지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제6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969년 1월 6일민주공화당의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은 현행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 개정하기 위한 문제가 여당 내에서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는 비공식 발언을 하였다. 이어, 이튿날인 7일 윤치영(尹致..

반혁명사건,5·16 군사정변,박정희,장도영,박창암,알래스카 토벌작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발표한 사건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김종필 중심의 육군사관학교 8기생 중심의 세력이 박정희 소장과 연합하여 주류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비주류 세력의 힘과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주류 세력은 각종 반혁명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반혁명 사건은 5·16 군사정변 이후 불과 두 달도 되기 전인 1961년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제거 사건이었다. 장도영과 주요 관련자들의 고향이 평안도 일대였기 때문에 일명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장도영 제거는 이미 군사정변 초기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장도영은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요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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