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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3

종계변무, 宗系辨誣, 명나라, 이성계, 대명회전, 윤이, 이초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종계'란 종가의 혈통,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차전투, 조선,명나라,만주 부차,후금,광해군,강홍립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이민환(李民寏)·이정남(李珽男)·김응하(金應河)·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

벽제관전투,임진왜란,1593년,벽제관(경기도 고양 역관),명나라, 일본군,여석령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던 역관)에서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과 조선 관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대패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은 황해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다. 이때 개성수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는 끝내 사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철수권유 때문에 퇴각하기는 했으나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다치바나(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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