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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3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숙종,인현왕후,소의 장씨(昭儀張氏),서인,남인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숙종,남인,서인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사촌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

갑술환국(甲戌換局),1694년,숙종,기사환국,남인,소론,노론

1694년(숙종 20)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장악한 정국(政局).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1694년에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실권을 쥐고 있던 남인계의 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 등이 민씨복위 운동의 주동자들을 심문, 그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폐비 사건을 차츰 후회하게 된 숙종은 오히려 기사환국 당시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에 신여철(申汝哲)·윤지완(尹趾完) 등 소론계 인사를 등용, 정국을 변화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추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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