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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3

헤이그특사, 1907년, 고종,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

제너럴셔먼호사건, 1866년, 고종,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경과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天津)에 기항하고 있던 중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

저고여피살사건,1225년, 고종, 몽고 사신 저고여

1225년(고종 12)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피살당한 사건. 강동성(江東城)의 전역(戰役)이 끝난 뒤 몽고는 고려에 대해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해서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특히,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으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고에 굴복했던 동진의 만노(萬奴)는 이때 서역지방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함을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1224년 정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는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주 01)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고를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대원군 집권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守舊派)의 정쟁(政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년,고종,독일인 오페르트,프랑스 신부 페롱

1868년(고종 5)의 남연군묘 도굴미수사건.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 載拔)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 제독 로스의 강화도 침범 당시 향토 및 수로 안내인 역할을 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구(球)의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Jenkins,F.), 페롱,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필리핀·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경과와 결과 오페르트 일행은 1868년 5월 차이나호(C..

아관파천,노관파천,1896년,고종,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俄館播遷) 俄館 아관 - 러시아 공사관 播遷 파천 - 임금이 피란을 가는것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노관파천(露館播遷)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

백마고지전투,국군 제9사단,1952년,철원 백마고지,중공군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

방곡령사건,1884년,고종,곡물반출 금지령,조선 일본 외교 분쟁

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

박영효국왕폐위음모사건,1898년,박영효,고종

1898년과 1900년 박영효가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꾀한 정변. 갑오개혁 시기 내무대신으로 개혁을 이끌던 박영효(朴泳孝)는 궁중 호위병 교체 시도를 둘러싼 역모 혐의로 실각하고 1895년 7월 조선을 떠났다. 박영효는 1896년 5월 이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을 규합하고, 이들과 조선내 동조자들의 협력을 얻어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역사적 배경 1896년 2월 아관파천 시기부터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몇 년간 군주권을 위협한 정치세력은 독립협회와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이었다. 독립협회를 구성하던 여러 정치세력은 일본의 망명자들을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고,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고종은 ..

동학운동(東學運動,1894년,고종,전봉준(全琫準)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운동은 처음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黃玹)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운동에 있어서 동학은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의 역할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사상적 계기 또는 농민운동의 지도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데서 나온 학설에 지나지 않다.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구제활동을 ..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1894년,고종,일본,조선의 내정 개혁 요구,속방론,청일전쟁

1894년(고종 31) 대군을 출병시킨 일본이 조선측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면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한 회담. 1894년 봄,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조선에 7천여 명의 대병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동학 농민군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일본군이 계속 조선에 주둔할 명목이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을 도모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려는 속셈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측은 청나라를 상대로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 뒤 조선은 6월 26일 이래 일본측이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해 오자, 7월 7일 내아문독판..

고부민란,1894년,고종, 조병갑,전봉준, 동학 운동 시발점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 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농민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고,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

갑오개혁, 1894년, 고종, 갑오경장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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