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고구려 4

평양 천도, 고구려, 장수왕, 427년, 국내성, 평양성,

고구려가 도읍을 압록강변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사건. 4세기대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고구려는 대폭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었다. 한편 장수왕의 재위 기간(412∼491) 동안 국제정세는 복잡하였다. 북연(北燕)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북위(北魏)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한편「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왜가..

안시성전투, 645년 ,보장왕,고구려,당나라,고연수, 고혜진, 양만춘,고당전쟁

645년(보장왕 4)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에서 벌인 공방전. 644년 당나라 태종(太宗)은 상당한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 침공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군량·선박·각종 공성구(攻城具) 등을 준비하는 한편,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고구려 변경지대의 형세를 정탐했다. 이어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구려 침공을 실천에 옮겼다. 경과 645년 4월 1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군의 선봉은 회원진(懷遠鎭)주 01)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通定鎭)주 02)에서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혼란시키기 위해 신성(新城)주 03)·건안성(建安城)주 04..

서안평전투,고대,삼국,고구려,동천왕,미천왕,위나라

서안평을 둘러싼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전투. 서안평은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으로 지금의 구련성(九連城) 동북 안평하(安平河)유역에 있었다. 종래 서안평은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곳이다. 146년(태조왕 94) 8월 장수를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게 하였다. 242년(동천왕 16)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며, 마침내 311년(미천왕 12) 완전히 탈취하였다. 서안평 탈취는 고구려가 한사군을 비롯한 중국세력을 축출하고, 요동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조선의 옛 영역을 되찾게 되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공무원..

삼국통일,7세기 중엽,신라,백제,고구려,통일정부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1) 삼국의 항쟁 삼국의 분립은 성읍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에게는 국력을 다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각기 숙원사업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고대국가에 있어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제국들은 대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먼저 민족을 통일하고, 그 통일된 힘으로 주위를 위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싸운 것이나 서로 동맹을 맺고 한쪽을 공격한 것, 주위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들도 모두 우선은 자신을 보존하고, 나아가 민족을 통일하려는 궁극적인 목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