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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3

강감찬(姜邯贊), 거란, 강조의 정변, 소배압, 강민첨, 구주대첩

고려전기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강궁진(姜弓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고려 태조,거란,낙타 50필,발해 멸망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한다. 926년(태조 9)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가던 중 942년(태조 25)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쳐왔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모두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으며,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듬해에 지어진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

거란, 여진, 말갈, 숙신, 선비, 돌궐, 흉노, 훈족

● 거란 5세기 이래 요하(遼河)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이에 물자가 풍부한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기 위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화북의 연운(燕雲) 16주(州)를 획득,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했으나 960년 송이 건국됨으로써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대제국을 형성한 거란은 북쪽의 초원지대와 남쪽의 농경지대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이원적 호한분치제도(胡漢分治制度)를 형성하였다. ● 돌궐 투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화한 말로, 처음에는 철륵(鐵勒: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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