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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조약 2

운요호사건,1875년,강화해협,조일수호조규,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고(西鄕隆盛)와 같은 급진파는 당장 조선정벌을 주창하고 나섰다. 반면 이와쿠라견외사절(岩倉遣外使節)로 구미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기도(木戶孝允)·오쿠보(大久保利通)와 같은 온건파는 점진적 정한론을 내세우며 급진파를 견제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정벌을 보류하고 호전적 무사계급의 불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군국적 침략정벌을 당한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에도막부,강화조약,통신사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에도막부[江戶幕府]와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전쟁 뒤 10년 만에 그들의 지속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이 조약이 성립되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 측에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이에 앞서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이러한 끈질긴 요청에 우리 측도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국교를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할 계획을 세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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