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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1937년,함경남도 갑산,양강도,김일성

Jobs 9 2021. 4. 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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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보천보 선전 그림

1937년 6월 4일 항일 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투.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전투는 1937년 3월 서강회의에서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국내 진공작전을 펴기로 결정함에 따라 김일성(金日成) 지휘 하에 수행된 것으로, 작전은 최현(崔賢)의 인솔 하에 한 부대를 무산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를 국경 지대인 임강·장백으로 진출시켜 일본군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 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 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 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 되자 당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공격은 1937년 6월 4일 밤 10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명이 2개의 습격조와 2개의 차단조, 1개의 정치공작조로 나뉘어, 제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하고, 제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본 군경을 전멸시켰다.

한편,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정치공작조는 김일성 작성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 그 밖의 격문들을 뿌리면서 정치선전을 전개하였다. 포고문의 내용은 ‘조선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호응하여 일제 통치를 분쇄하고 조선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로써 국내 진공의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를 하였는데, 철수 시 많은 주민들이 이들을 도와 노획물자 운반에 동참하는 등 가담을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구시산과 간삼봉(間三峰)에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또다시 격퇴하였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공격부대가 김일성의 부대가 아니라 또 다른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이끈 부대였다는 설,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고 무장 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뿐이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한 물자 보급 투쟁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 등으로 볼 때, 북한에서 역사적인 항일 승리 전투라고 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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