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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터의 산문, 이양하

Jobs 9 2024. 1. 1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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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나의 애독하는 서적을
제한하여 이삼권 내지 사오 권만을 들라면,
나는 그 중의 하나로
옛날 로마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들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겠다.
혹은 설움으로 혹은 분노로, 혹은 욕정으로 마음이 뒤흔들리거나,
또는 모든 일이 뜻같이 아니하여, 세상이 귀찮고,
아름다운 동무의 이야기까지 번거롭게 들릴 때
나는 흔히 이 견인주의자 황제를 생각하고,
어떤 때는 직접 조용히 그의 명상록을 펴 본다.

그리하면, 그것은 대강의 경우에 있어,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회복해 주고,
당면한 고통과 침울을 많이 완화해 주고, 진무해 준다.
이러한 위안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르거니와, 그것은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내 마음에 달렸다."
"행복한 생활이란 많은 물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모든 것을 사리하라. 그리고, 물러가 네 자신 가운데 침잠하라."

이러한 현명한 교훈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그 가운데 읽을 수 있는 외로운 마음,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생활의 필요조건이 되어 있는 마음,
행복을 단념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정만을 구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목전의 현실에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현실을 아주 무시하고
망각할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 편이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
그 위안은 건전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일종의 지적 오만 또는 냉정한 무관심이
황제의 견인주의의 자연한 귀결이요,
동시에 생활 철학으로서의 한 큰 제한이 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반면, 견인 주의가 황제의 생활에 있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고,
견인주의자의 추구하는 마음의 평정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의 한 기본적 자체가 된다는 것만은
또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에 번역해 본 것은 직접 명상록에 번역한 것이 아니요,
월터 페이터가 그의 <쾌락주의자 에어리어스>의 일장에 있어서,
황제의 연설이라 하여, 명상록에 임의로 취재한 데다
자기 자신의 상상과 문식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페이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기말의 영국의 유명한 심리 비평가로,
아름다운 것을 관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예 부흥>의 찬란한 문체도 좋아하니,
이 몇 구절의 간소하고 장중한 문체도, 거기 못지 아니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황제의 생각도 페이터의 붓을 빌려 읽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한층 아름다운 표현을 얻었다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사람의 칭찬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단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의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해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 자에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일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에 회자하는 호머의 시구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의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녀자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긴 자나,
모두가 다 가지고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 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 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현존하는 것,
또는 인제 막 나타나려 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속히 지나가는 것인지를 생각하여 보라,
그들의 실체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 모를 때의 심연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괴로워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한 물상 가운데서 네가 향수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용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토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공사를 막론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때때로 그들의 분노와 격렬한 패기로 오늘까지 알려진 사람들
저 유명한 격노와 그 동기를 생각하고, 고래의 큰 싸움의 성패를 생각하라.
그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었으며 그들의 전진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먼지요, 재요, 이야기요, 신화 아니 어떡하면 그만도 못한 것이다.
일어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증대시하여,
혹은 몹시 화를 내던 네 신변의 사람들을 상기하여 보라.

그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너는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네 육신과 영혼을 생각해 보라.
네 육신이 차지한 것은 만상 가운데 하나 미진,
네 영혼이 차지한 것은 이 세상에 충만한 마음의 한 조각,
이 몸을 둘러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며
노령과 애욕과 병약 끝에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또는 그 본질, 원형에 상도(想到)하여 가상(假想)에서 분리된 정체를 살펴보고,
만상의 본질이 그의 특수한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을 생각해 보라.
아니 부패한 만상의 원리 원칙에도 작용하는 것으로 만상은
곧 진애요, 수액이요, 악취요, 골편, 너의 대리석은 흙의 정결,
너의 금은은 흙의 잔사에 지나지 못하고 너의 명주옷은 벌레의 잠자리,
저의 자포는 깨끗지 못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아! 이러한 물건에서 나와 다시 이러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아! 이러한 물건에서 나와 다시 이러한 물건으로 돌아가는
네 생명의 호흡 또한 이와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에 미만해 있는 큰 영은 만성을 초와 같이 손에 넣고
분주히 차례차례로 짐승을 빚어 내고 초목을 빚어 내고 어린애를 빚어 낸다.
그리고 사멸하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서 아주 벗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 안에 남아 있어 역시 변화를 계속하고
자연을 구성하고 또 너를 구성하는 요소로 다시 배분되는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변화한다.
느티나무 궤짝은 목수가 꾸며 놓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것과 같이
부서질 때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있어 네가 내일 길어도 모레 죽으리라고 명언한다 할지라도
네게는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내일 죽지 아니하고
일년 후, 이년 후, 또는 십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도록 힘써라.

만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는 때문이니까.
너는 그것을 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일 죽음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외관과 관념을 사리하고
죽음 자체를 직시한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한 이법에 지나지 아니하고,
사람은 그 이법 앞에 겁을 집어먹는 어린애에 지니지 못하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죽음은 자연의 이법이요,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철인이나 법학자나 장군이나 우러러 보이면
이러한 사람으로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라.
네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는 네 조상 중의 한 사람,
옛날의 로마 황제의 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라.
그러면 너는 도처에 네 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보라.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대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네 자긴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너는 네 생명이 속절하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머물러 있으랴?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그 가운데 던져지는 모든 것을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기까지는
세상은 한 큰 도시,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으로 이때까지 살아왔다.
아! 온날을 세지 말며, 그날의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한 판단이나 폭군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 온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의 상관할 일이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선의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새, 졸업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그렇지만 살아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새록새록 맴도는 명문장이 있다.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리고 <페이터의 산문>이다. 원문도 그러하지만 우리말로 옮긴 그 문장이 오히려 청람(靑藍)이다.

더구나 대선을 눈앞에 둔 지금.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이들 문장 앞에서 우리를 새삼 부끄럽게 한다.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人口에 회자(膾炙)하는 호머의 싯구 하나로도, 이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또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諛者)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길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것이다."

이는 월터 페이터가 그의 <쾌락주의자 메어리어스> 의 일장에서 황제의 연설이라 하여, 고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 <명상록> 에서 임의로 취재한 데다 자신의 상상과 문식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을 이양하 선생이 다시 우리말로 옮긴 명문장 그 가운데 한 구절이다. 

마침 이번 대선 주자들 중 유독 한 분이 평소 자신이 애독하는 고전으로 그 <황제의 명상록> 을 뽑내며 들기를 주저하지 않아 그 양반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보고 뜯어보아도 도저히 그같은 흔적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전혀 아닌 동떨어짐 괴리(乖離)였다. 

아우렐리우스. 그는 16대 로마의 황제이나 그 이전 스토아철학파의 철학자로 견인주의자이다. 그렇건만 대선 주자로 나선 그 양반의 그 어느 구석에도 황제의 그같은 견인주의 철인의 그림자가, 마지못해 그 끝자락이라도 붙들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요원했다. 

어떻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대통령이 되고야 말겠다" 는 모질고 추악한 권력에의 그 집착이 황제의 견인주의 금욕주의 근처에나 갈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야말로 그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작태인 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기만이요 추태가 아닐 수 없다. 

`나라야 어찌되든 오로지 이 한 몸 내 권솔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는 막가파식 시류(時流). 그에 앞장서고 뒤따르는 도배(徒輩)들. 그들이 지금 우리를 분노케 하건만... .

그래서도 오늘 나는 이 명문장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분노를 평정하기 위한 침잠이다. 침묵이 아닌 내 영혼의 정화(淨化)가 이처럼 절실할 때가 없었다.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또 읽는 자아발견이다. - We will find myself in reading.

<1>
울음 우는 아이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고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 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휠데를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 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 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자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하략)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시나크

<2>
사람의 칭찬 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判官)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死後)에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해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 사람의 하나 하나가, 얼마 아니 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 자체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人口에 회자(膾炙)하는 호머의 싯구 하나로도, 이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諛者)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길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 하는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현존하는 것, 또는 인제 막 나타나려 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속히 지나가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라.

그들의 실체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 모를, 때의 심연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서러워하고, 혹은 괴로와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享受)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許與)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토( Clotho : 고대 그리이스의 여신. 인생의운명을 맡은 세 여신 중에서 가장 젊은 여신 )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때때로 그들의 분노와 격렬한 패기로 오늘까지 알려진 사람들 ― 저 유명한 격노(激怒)와 그 동기(動機)를 생각하고, 고래(古來)의 큰 싸움의 성패를 생각하라. 그들은 지금모두 어떻게 되었으며, 그들의 전진(戰塵)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먼지요, 재오, 이야기요, 신화(神話), 아니 어떡하면 그만도 못한 것이다. 일어나는 일을 중대시(重大視)하여, 혹은 몹시 다투고 혹은 봅시 화를 내던 네 신변(身邊)의 사람들을 상기(想起)하여 보라. 그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과연 어디 있는가? 너는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염두(염頭)에 두고, 네 육신과 영혼을 생각해 보라. 네 육신이 차지한 것은 만상(萬象) 가운데 한 미진(微塵), 네 영혼이 자지한 것은 세상에 충만한 마음의 한 조각. 이 몸을 둘러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며, 노령과 애욕과 병약 끝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또는, 그 본질, 원형에 상도(想到)하여 가상(假象)에서 분리된 정체(正體)를 살펴보고, 만상의 본질이 그의 특수한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을 생각해 보라. 아니, 부패(腐敗)란, 만상의 원리 원칙에도 작용하는 것으로, 만상은 곧 진애(塵埃)요, 수액(水液)이요, 악취요 골편(骨片). 너의 대리석은 흙의 경결(硬結), 너의 금은(金銀)은 흙의 잔사(殘渣)에 지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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