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소, 유치진, 비극, 사실주의 극

Jobs 9 2022. 5. 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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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농촌의 궁핍과 사회적 모순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극으로, 소작농과 마름의 갈등 속에 첨예한 사회의식이 드러나 있다.

* 갈래 : 장막극, 비극, 사실주의 극
* 성격 : 사실적, 현실적, 고발적
* 배경 
① 시간 - 1930년대
② 공간 - 어느 가난한 농촌
* 제재 : 소
* 주제 : 가난에 시달리는 일제 강점기 농촌의 현실
* 특징 : 사실주의 계열의 첫 장막극임.
* 출전 : “동아 일보”(1935)

 

어휘 풀이

* 타작(打作)마당 : 타작(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하는 마당. 품 삯을 받고 하는 일.
* 사대육신(四大六身) : 두 팔, 두 다리, 머리, 몸뚱이라는 뜻으로, 온몸을 이르는 말.
* 점지 : 신불(신령과 부처)이 사람에게 자식을 갖게 하여 줌.
* 공진회 : 각종 산물이나 제품들을 한곳에 많이 모아 놓고 품평하고 전시하는 모임.
* 내력(來歷) : 지금까지 지내온 경로나 경력.
* 마름 :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 ≒사음(舍音).
* 실념 : 곡식알이 여물고 익음.
* 말세(稅) : 곡식을 사고팔 때 가운데서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 도지(賭地) : 도조. 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
* 보퉁이 : 물건을 보에 싸서 꾸려 놓은 것.
* 팔자소관(八字所關) : 타고난 운수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
* 근실(勤實)히 : 부지런하고 진실하게.
* 무방(無妨)하다 : 거리낄 것이 없이 괜찮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35년에 발표된 사실주의 희곡으로, 일제 강점기에 삶의 터전과 희망을 상실한 채 몰락해 가던 농민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모두 ‘소’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빚어진다. 일제의 수탈 정책 때문에 몰락해 가는 농촌의 현실 속에서 국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를 소중히 지키려 하지만, 두 아들은 저마다의 개인적인 이유로 소를 팔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은 사음에게 소를 빼앗기게 되면서 국서 가족으로 대표되는 소작농과 지주 간의 계층적 갈등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사건의 이면에는 일제 강점기의 모순적 사회 구조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체 줄거리

[발단] 국서는 좋은 품종의 소를 가진 것을 긍지로 삼고, 아들들보다 더 애지중지한다. 차남 개똥이는 만주에 가서 일확천금을 모을 궁리로 소를 팔아 노자를 마련해 달라고 조른다. 장남 말똥이는 빚 때문에 일본으로 팔려 가게 된 귀찬이와의 결혼을 위해 소를 팔 것을 조른다.
[전개] 국서네는 결국 소를 팔아 귀찬이네 빚을 갚아 주기로 하고, 개똥이는 소를 몰래 팔아 만주로 떠날 궁리를 한다.
[절정] 소장수가 그 소는 이미 팔리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해, 개똥이는 의심을 받게 되고, 집안에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다. 그 와중에 마름이 나타나 밀린 빚 대신에 소를 끌고 가 버린다.
[하강] 귀찬이는 결국 일본으로 팔려 가고, 국서는 소를 찾기 위해 마름과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하기로 하나, 소송을 해 봤자 소작인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말에 절망한다.
[대단원] 말똥이는 지주네 곳간에 불을 질러 주재소에 붙잡혀 가고, 개똥이는 만주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 ‘소’의 또 다른 줄거리 : ‘소’는 1935년 동경에서 초연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일제의 검열 때문에 내용이 개작되어 ‘풍년기’라는 제목으로 1937년에 공연되었다. 본래 ‘소’가 비극으로 끝맺는 것과 달리, ‘풍년기’는 마지막에 빼앗겼던 소가 다시 돌아오는 등 반전이 제시되며 희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인물 소개

* 국서 : 농사꾼. 선량하지만 현실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해 온 농사일과 전통적 가치관만을 고수하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인물이다.
* 말똥이 : 국서의 장남. 동네 처녀 귀찬이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농사일을 거부함으로써 현실에 대해 소극적인 저항을 보이는 인물이다.
* 개똥이 : 국서의 차남. 일확천금을 잡으러 만주로 떠나려 하는 다소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 귀찬이 부 : 국서의 이웃. 경제적 고난 때문에 딸을 팔면서도 딸에게 닥칠 불행을 읽어 내지 못한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인물이다.
* 사음 : 국서네 마을 소작농들의 도지를 관리하는 마름. 이기적인 성격이다.

 

작품 연구

‘소’를 매개로 한 등장인물 간의 갈등 양상

소재 ‘소’의 상징적 의미

국서에게 ‘소’는 정신적 기둥이며, 개똥이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열어 줄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말똥이에게는 사랑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소’는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이자 희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일제의 불합리한 소작 제도에 의해 소를 빼앗기게 되는 현실은 국서네로 대표되는 우리 농촌 공동체의 희망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더욱 확대해서 본다면, 일제에게서 지켜 내야 할 민족혼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국서가 사용하는 말투의 특징과 그 효과

이 작품에서 국서는 비속어와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비속어와 방언의 사용을 통해 등장인물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에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다.

국서의 두 아들이 보이는 현실 대응 방식

국서의 두 아들(말똥이, 개똥이)은 모두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있다. 먼저 개똥이는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여 농사일을 거부하며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는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말똥이는 밀린 빚 대신 소를 끌고 간 마름의 곳간에 불을 지르는 행동을 한다. 이 작품에서 이들 형제의 이러한 저항 의식은 점차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소’의 문학사적 특성

작가의 현실 의식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작가의 처녀작인 ‘토막’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가난한 소작농과 마름의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농촌이 일제 수탈 정책의 가장 큰 피해 지역이요, 농민은 가장 큰 희생을 강요당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고난 속의 해학

‘소’는 당시 현실을 반영하는 비극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사이에 희극적인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러한 희극적 요소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준다.
*비극적인 장면과 희극적인 장면을 교차함으로써 극적 긴장이 이완된다.
*현실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 즉 고난과 웃음이 공존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reality)이 보다 풍부하게 제시된다.
*결말의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키며 비장미를 자아낸다.

 

작가 소개 - 유치진(柳致眞, 1905~1974)

극작가, 연출가, 연극 평론가. ‘극예술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근대극의 확립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의 현실을 고발했으며, 광복 후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극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 ‘버드나무 선동리의 풍경’, ‘자명고’, ‘원술랑’ 등이 있다. 

 

소(유치진) 함께 읽어보기

‘사하촌’, 김정한/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 소설이다. 사하촌에서 저수지 물길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지주 계층(친일 세력과 보광사 중들)과 소작농(사하촌 주민) 사이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가뭄과 지주의 횡포로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농민 스스로의 자각이 드러나 있다.

‘홍염’, 최서해/일제 시대 만주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

서간도를 배경으로 조선 이민 농부들의 비참한 삶과 그에 대한 저항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문 서방이 빚 때문에 지주에게 딸을 빼앗기고 이 작품의 말똥이처럼 지주의 집에 불을 지름으로써 그 울분을 표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오는 사람들>
국서 : 농부, 50세
그의 처
우삼 : 이웃 사람
문진 : 이웃 사람, 일꾼, 별명 '텁석부리'
영실 : 이웃 사람
말똥이 : 첫째 아들, 26세
개똥이 : 둘째 아들, 23세
늙은 일꾼
젊은 일꾼
국진 : 국서의 아우, 35세
귀찬이 : 동네 처녀, 17,8세쯤
소장수 A, B, C
귀찬이 부 : 40세쯤
유자나무 집 셋째 딸
사음(마름)
기타 : 일꾼, 동네 사람, 동네 젊은 사람, 동네 계집애, 어린애, 술집 하인 등 다수
 
<때> : 193X년
<곳> : 시골 농가
<무대>
좌편에는 헛간, 우편에는 마당, 마당에는 바깥 행길의 일부분을 경계하는 울타리. 그러나 이 집에서는 울타리 밖 행길에다가 일쑤 소를 매어 둔다. 울타리에는 길로 빠지는 조그만 삽짝문이 있다.
 
헛간 좌편 벽에는 방문, 그 앞에 툇마루, 헛간의 후방에는 집 곁으로 통하는 입구. 마당에는 빨간 감이 군데군데 달렸다.
 
명랑한 늦은 가을 철.
 


제 1 막
 
집 뒤에 타작 마당이 있는 듯 거기 일꾼들이 간간이 외치는 소리와 군호마저 해가며 노래 부르는 소리 들린다. 무대에는 절구통 뒤에 가마니를 쓰고 말똥이(더벅머리 노총각, 돼지꼬리 같은 댕기를 드렸다.)가 숨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없다. 웬일인지 말똥이는 오늘 아침부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국서

(집 곁에서 소리만) 말똥아! 말똥아! 이 배라먹다 죽을 놈이 어딜 갔어? (헛간으로 나온다. 완고한 농사꾼. 뒤통수에 눈꼽재기만 한 상투가 붙었다.) ……일은 허지 않쿠 이 육시를 헐 놈이 어디로 새 버리고 말었나? 원, 사람이 바뻐 죽겠는데 …… (이웃 사람 우삼 등장)
우삼 국서, 어때? 타작 잘들 하나?
국서 그저 그러이. 저 타작 마당으로 가세. 술이나 한 잔 나눠 먹게.
우삼 너남즉 할 것 없이 농사는 잘 됐어. 참 금년이야말로 풍년이야. 가다 드문 대풍년이거든!
우삼 헛간 입구로 퇴장. 개똥이 울타리 밖 행길에 나타난다. 뱃일 하는 사람이 흔히 입는 툭툭한 샤쓰를 입고 조타모를 썼다.
국서
 
이놈 개똥아! 오늘같이 바쁜 날에 너는 어디를 쏘다니니. 없는 돈에 삯꾼 얻어서 일허는 것을 보구. 그래 사대육신 성헌 놈들이 왜 그렇게 빈둥거리고 노느냐 말이야? 이놈, 성 녀석은 또 어디 갔니?
개똥이 (퉁명스럽게) 못 봤수, 나는.
국서
 
에이 죽일 놈들! 자식들 있다는 보람이 어디 있어! 그저 삼신 할머니의 잘못이야. 이 따위를 자식이라구 점지해 주신 삼신 할머니가 아예 미쳤어!
개똥이
 
아버지. 그렇게 부화만 내지 마시구 내게 노자를 만들어 주. 나같이 배 타고 돌아다니는 놈을 붙들고 농사를 지으라니 될 말이오. 여기서 이냥 놀기만 해두 갑갑해 죽겠는데.
국서
 
이놈아, 네가 아무리 뱃놈이기로서니 애비가 바빠서 이러는데 좀 거들어 주었다구 뼉다귀가 뿌러질 게 뭐냐?
개똥이
 
……저 이것 봐요 아버지. 우리 집 소, 그만 팔아서 나 노자해 주. 네? 나 만주 가서 돈 많이 벌어가지구 올게. 일천오백 냥(30원)만 있으면 돼요.
국서
 
 
 
 
뭐? 소를 팔어? 원, 이 지각 없는 자식놈의 소리 좀 들어 보게. 이놈아, 우리 소는 저래 봬도 딴 데 있는 그런 너절한 소하고는 씨가 다르다. 너두 알지? 우리집 소의 사촌의 아버지의 큰형님뻘 되는 소가, 그러니까 우리 소의 사촌의 큰아버지뻘 되는 소지, 그 소가 읍내 공진회에 나가서 도 장관 나리한테서 일등상을 받았어. 정신 채려라! 일등상이야. 그런 내력 있는 소를 함부로 팔아? …… 그 소가 우리 집에서 그저 밭이나 갈고 이웃에 불려가서 품앗이나 들고 하니까 그저 이놈이 업수이 여겨서.
개똥이 아버지, 요즘 만주만 가면 돈 벌이가 참 많대요, 이 때가 바로 물땝니다.
국서
 
 
 
흥, 이놈아, 건성으로 돈이 사람을 따르는 줄 알아서는 안 돼. 너 따위 배 타러 다니는 놈이 그렇게 대가리에다가 지꾼지 처지를 처바르고 게다가 비단조기까지 잡숫고 그래가지고두 돈을 벌어? 당최 그런 생각일랑 염두에도 두지 말고 뒷길에 가서 소 마구간이나 치워라. 그리고 성 녀석 만나거든 어서 타작 마당으로 오라구 그래.
개똥이 아버지, 그렇지만.
국서 얼른, 이놈아! 시키는 대로 좀 고분고분히 해라! (개똥이 하는 수 없는 듯이 집 뒤로 나간다.)
이때 좌편에서 술집 하인 자전거로 술을 한통 싣고 온다.
술집 하인 술 가져 왔어요.
국서 그래, 이리로 가져 온. 너 행길에 오다가 혹 우리 집 말똥이 못 봤니?
술집 하인 못 봤어요.
국서 원, 이런 육실한 놈이 어딜 갔담! (국서 술집 하인을 데리고 헛간 입구로 퇴장)
말똥이 (부르퉁해져서 쓰고 있던 가마니를 심술스럽게 뜯는다.) …… 아무리 아버지가 그래두 뒷간에서 개부르드키 그렇게 쉽게는 나를 못 불러 쓸거야, 빌어먹을! 누가 일을 헌담! ……흥,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시키게. 나는 싫어. 막 죽어두 일은 안 헐 테야.
집 뒤에서 타작하는 소리. 깽맥이 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문진이 헛간 입구에 나타난다.
문진 (소리친다) 자, 술 먹으로들 오게! …… 아무도 없구나. (사라진다.)
말똥이 (끙끙댄다) …으! 아이 갑갑해 … 술만 처먹구 지랄병만 허면 제일이야. 빌어먹을! (몸부림친다)
(집 뒤에서 일꾼들의 노랫소리 들린다.)
헛간 입구를 통해서 우삼이와 문진이가 어깨를 출썩거리고 춤추는 게 보인다.
말똥이
 
……에그, 그 거드럭대는 꼬락서니 참 볼 수 없군! 풍년이 왔으면 먹을 꺼나 남을 줄 아니까 장관들이지. (가마니를 둘러쓰고 다시 눕는다.)
문진 (어깨춤을 추고 헛간으로 나온다.)
우삼
 
 
(문진이와 같이 따라 나오며) …… 유월 저승을 지나면 팔월 신선이 닥쳐 온다는 것은 이 때를 두고 한 말이지. 밋건덩 유월, 둥둥 칠월, 어정 팔월이란 말은 잘헌 말이거든! 더구나 금년같이 철이 잘 들고서야 어느 빌어먹을 놈이 농사짓기를 마다하겠는가, 허허헛……텁숙부리!
문진 (어깨춤을 추며) ……암, 도처에 춘풍이지 키키키…….
영실
 
(술을 한 바가지 얻어키고 김치 가닥을 물고 헛간 입구에서 나오면서) 잘 먹구 갑네다. 술맛 좋은데. 국서, 우리집 타작은 모레니까 그저 바쁘잖거든 오오. 실컷 술 대접헐 테니까. (퇴장)
국서 (나오며) 그래. 가구말구요.
우삼 …… 농사는 태국평천하지본이라 …… 그렇지, 텁석부리?
문진
 
그런 케케묵은 소리는 치우게. 그보다 이게 어때, 우삼이? 농사를 짓다가는 말라 죽나니라 ……핫핫…….
우삼
 
(문진이와 같이 웃는다. 그리고) ……아, 잘 취했는데, 국서, 나는 잘 먹구 가네. (우편에서 들어오는 사음을 만나) 마름 나으리, 날새 편안하십네까?
사음 자네 잘 취했구나, 우삼이.
우삼
 
금년 같은 해 안 취허구 언제 취해 보겠습니까? 작년에는 물이 없어 못해 먹구, 재작년에는 물이 많어서 못해 먹었죠. 그러다가 금년에야말로 풍년이거든요. (풍년가를 부르며 퇴장)
(헛간 입구에서 사음을 발견하고) 아이구 마름님. 어서 오시오, 술 좀 자셔요.
사음 (술을 한 바가지 키고) …… 술 맛 좋은데, 국서는 어딨나?
금방 여기 있었는데요. 저기 타작 마당으로 갔나 봅니다.
사음 어때? 금년에는 볏섬이나 늘겠지? 곡식들이 잘 됐으니까.
문진 암요. 도처에 춘풍이거든요.

 
아무려면 작년 재작년의 흉년에다가 비하겠습니까? (사음, 헛간 입구를 통해 타작 마당으로 퇴장. 다른 사람들도 다 따라 나간다.)
말똥이
 
 
 
(혼자) …… 마름 녀석. 말세나 좀 낫게 받으려구 그저 알랑거리지! (일어서다가 발끝에 밟히는 것을 툭 차며) 이건 뭐야! (말똥이, 물독에서 물을 한 바가지 키고 절구통에 걸터앉는다. 여태까지 들리는 깽맥이 소리 멀리 들린다. 국서의 처와 술집 하인 헛간으로 나온다. 국서의 처는 방에 가서 돈을 내어 술값을 치른다. 술집 하인 자전거를 타고 우편으로 등장. 국진이, 헛간 입구에 나타난다.)
국진 (국서의 처더러) 아주머니, 이 함지 좀 꿰매어 주슈, 얼른! (함지를 두고 나가 버린다.)



 
 

 
원, 이렇게 바쁠 적에 하필 이건 왜 깨지누? (함지를 가지고 다시 헛간으로 들어온다.) …… 어디 이걸 꿰맬 무슨 끄나풀이나 없나? 참! 방문위다 내가 삼[麻] 끈을 얹었더라. 아이구 높아서 키가 안 자라네. 무슨 발돋움할 꺼나 없나. (발돋움할 것을 찾다가 말똥이를 발견) 에그! 이놈이 여기 있었구나! 우리 그걸 몰랐지 ……. 대관절 이놈아,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응? 외아들 잡아먹은 할미상을 허구. 이건 뭐야, 이 덩덕새 머리는? 애걔 꼴불견이로구나. 이놈아, 네 아버지한테 들키기만 해 봐. 난수로 맞을 테니까. 철없는 응석받이가 아닌 담에야 바뻐서 눈코 뜰 새 없는 이 때에 왜 게으름을 피고 있담! 자― 생트집일랑 그만 허구 아침이나 먹구 얼른 타막 마당에 나가거라. 아버지가 뭐라구 야단하시거든 그저 배가 아퍼서 모정방에서 좀 엎드려 있었다구 그래.
말똥이 놔! 싫어! 일해두 못 얻어 먹기는 마찬가지지.
에그, 이게 무슨 소리야. 농사짓는 놈이! 이놈아, 그런 속알찌 없는 소리 말구 얼른 일어나! 네가 한두 살 먹었니? (말똥이, 그예 일어나지 않는다.) 에그 기막혀! 이놈아, 빨리 일어나서 일 좀 해라!
귀찬이 부. 어수룩한 중년 농부. 이 때에 등장.
귀찬이 부 왜 이러우? 아들허구?

 

 
 
세상에 이것 봐요. 오늘같이 바쁜 날에 이놈이 집안은 맞잡어 도울 줄 모르고 여기 눌러붙어서 막 악을 쓰지 않겠소. 아주 '일해두 못 얻어 먹기는 마찬가지지.' 이러면서요. 우리 집안에서는 도무지 이런 자식은 없었어요. 이게 무슨 귀신이 씌었거나 그렇잖으면 정신이 뒤집혔거나 했다 봐요. 조선 천지에 농사지어 먹는 놈으로 이런 주둥우라를 놀리고 이렇게 게으름을 피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이우? 다른 집에서는 일을 해 먹을랴두 농토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 지경인데. 참 앙아라 보살이 내릴 일이지.
귀찬이 부 아마 어디가 아픈 거겠지요. 말똥아, 어디가 아프니?

 
아프긴 어디가 아퍼요. 어제는 햅쌀밥을 했는데 꾹꾹 눌러 담은 제 목아치를 한 그릇 다 처먹구, 게다가 에미 목아치까지 빼앗어 먹구, 그리구 방귀를 퉁퉁 뀌든데요.
귀찬이 부 이놈아. 일이 세어서 몸이 괴롭니?

 
 
 
괴롭다구 드러눕는 농사꾼이 어디 있겠수? 그러면 바루 상감봉 팔자게. 아마 무슨 귀신이 씌었나 봐요. 어느 점쟁이를 불러다가 물어 봐야지. 그렇잖으면 이럴 이치가 없어요. 농가에서 가을철에 일 많은 건 어디 금년에 시작된 노릇입니까? 어제까지두 이놈은 일을 잘했어요. 힘이 세서 밥도 잘 먹구 그랬는데, 별안간 오늘 아침부터 이래요, 밥도 안 먹구.
귀찬이 부 불시에 벙어리가 됐니? 이놈아, 무엇이 싫거든 싫다구 탁 털어놓고 말을 해 봐.

 
아니야요. 정녕 귀신이 씌인 탓입네다. 내 버려 둬요. 타작이나 마치거든 막걸리나 받아다가 터줏님께 걸찍허게 고사를 드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도시 낫지 않을 병입네다.
말똥이 (슬며시 감나무 밑에 가서 앉는다.)
귀찬이 부 참, 무슨 곡절이 있나 봅니다. 몸이 아퍼서 그런 것두 아니라면.
내 버려 둬요. 우황 든 황소같이 저러다가 그만 뒤어지게.
귀찬이 부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그만두고 저 문 위에 있는 삼 노끈이나 좀 내려 주어요. 사람이 바쁘니까 함지까지 성화를 부린단 말이야.
귀찬이 부
 
(삼 노끈을 내려 주며) 나 도리깨 좀 얻으러 왔는데요. 우리는 콩 몇 말 되는 것 미리 두들겨 팔아야겠어요.
저기 걸렸지요.
귀찬이 부
 
(도리깨를 내리며) 참, 댁의 이번 추수는 어때요? 올해는 물이 흔해서 우리 동리엔 전반으로 잘 됐나 봐요. 젠장, 해마다 흉년에 쪼들리더니 이번에는 좀 허리를 펼는지.

 
농사가 잘 되면 어디 논임자 밭임자가 가만둡니까? 이 몇 해 동안 밀려 내려오든 콩도지, 쌀도지를 이번에 들어서 죄다 받어 낼려구 덤비는 걸요. 되려 흉년이 드는 것만 같지 못할까 봅니다.
귀찬이 부
 
 
(소리를 낮추어서) 그런데 저, 댁에서도 이런 소문을 들었어요? 어찌 되는 건지 내년부터서는 무슨 농지령이란 법령이 새로 내린다나요. 그래서 입때까지 밀린 도지는 이번 추수까지 다 해 들여 놔야 한대요. 그렇잖으면 논을 떼고 막 집행을 헌대요.
우리한테는 금년 봄부터 그런 말썽이군요. 어찌 되는 놈의 세상인지.
귀찬이 부 허는 수 없어서 우리는 우리 집 귀찬이란 년을 팔아 먹게 했지요.
귀찬이를? 그 얌전한 애를?
귀찬이 부
 
 
도지를 갚지 않으면 논을 뗀다는 데야 해 볼 장수가 있나요. 자식이라도 팔어서 갖다 갚어야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꿩 잃고 매 잃는다는 셈으로 논은 논대로 떨어지구 자식은 자식대로 굶겨 죽일 걸.
말똥이 (혼자말같이) …… 논이 떨어지면 어쩌란 말야! 빌어먹을! 자식 팔아 먹구 잘 되는 집안은 못 봤어. (퇴장)
(말똥이를 바라보고) 저런! 육실할! 저놈이 바로 환장을 했어! …… 그런데 귀찬이는 영 팔게 했수?
귀찬이 부
 
 
2천냥[40원]에 아주 작정을 지었답네다. 그것두 원체 요즘은 이곳 저곳서 계집애 팔려는 데가 많아서 좀체 사 갈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는 것을 읍내에 나까무라상헌테다가 말해서 일본으로 팔게 했어요. 선금으로 우선 천 냥[20원] 받고, 도장 찍구 계약까지 했지요.


 
 
에그, 댁에는 딸을 잘 가져서 보퉁이 신세는 면하시겠구려. 우리 집에는 사내 새끼가 둘이나 있으면서 무슨 팔자 소관으로 그런지 사람의 간장을 이처럼 썩이는구려. 한 자식은 배 타러 다닌다구 떠댕기다가 집에 들면 농사짓는 것을 업수이 여기구, 한 자식은 여태 근실히 잘 하든 놈이 버쩍 오늘부터 병든 황소같이 늘어 자빠지니…… 우리 집안에는 무슨 망쪼가 든 거야요. 그렇잖으면 이럴 리가 없어요.
귀찬이 부 (일어서며) …… 계집애가 나서 귀찮스럽다구 해서 개 에미가 귀찬이란 이름을 붙였지요. 그랬는데 그게 되려 우리한테 덕을 뵈겠지요. 이힛힛 …….
참 세상일은 모를 일이야요. 뭐든지 그저 거꾸로만 돼 가거든요. 춘향모의 문자가 아니라도 인젠 아들 낳기는 바라지 말구 딸 낳기만 바래야겠군요 …… 이왕이면 저 뒤에 가서 술 한 잔 자시고 가슈.
귀찬이 부 술요? 웬 게 남었수?
국서의 처, 귀찬이 부를 데리고 헛간으로 나가려 한다. 그럴 적에 국진이 낫을 들고 들어온다.
국진 (국서의 처에게) 함지 다 됐어요? …… 에그, 얼른 좀 꿰매세요.
국서의 처와 귀찬이 부 헛간 입구로 나간다. 국진이 숫돌을 찾아서 낫을 갈기 시작한다.
사이, 유자나뭇집 셋째딸의 노랫소리 우편에서 들린다.
(노래) 청치마 밑에다 소주병 차구서 오동나무 숲으로 임 찾아가누나.
우편에서 무대로 돌멩이 5, 6개 튀어 들어온다. 유자나뭇집 딸, 돌에 맞어 비명. 그쪽을 향해서 국진이 소리친다.
국진 이놈들아, 왜 돌질을 해!
유자나무집 딸 (상처를 만지며 빙글빙글 웃으며 우편에서 들어온다. 뒤를 돌아보며) …… 괜히 쟤들이 돌질을 하지. 아마 나를 미치광인 줄 아나 봐. 히힛……(돌을 도로 주어 던진다.)
국진 좀 비틀거리는 걸 보니 너 어디서 취했구나 또?
유자나무집 딸

…… 임순네 집 타작하는 데서 한 잔 얻어 먹었죠. 이것 봐요. 나는 취하기만 하면 우리 서울 나지미상 생각이 나. 우리 나지미상은 목에다가 빨간 댕기를 두르고, 두 눈은 새까맣고 …… 참 멋쟁이 서방님이더니 …… (헛간으로 나오는 국서의 처를 보고) 개똥 어머니, 날새 안녕합니까? 개똥이는 어딨어요? 네?
왜 넌 밤낮 개똥이만 찾어다녀? 걔 아버지헌테 들키기만 허면 또 혼날려구!
유자나무집 딸 그런 말 마세요, 개똥 어머니. 그러면 개똥이꺼정 나를 싫어해요 …… 흥, 싫어하면 어때? 나만 정들었으면 그만이지 …… (힘없는 콧노래를 부르고 나간다.)
국진 (낫을 갈아 들고) 저 계집애 신세도 말씀이 아니로군. (집 뒤로 퇴장)
<중략>


제 2 막
(전막과 같은 무대. 전막의 다음날 아침. 사음은 국서와 더불어 툇마루 양지에서 산가지 계산을 하고 있다. 도조의 셈을 따지는 것이다. 국서의 처는 부지런히 소에 꼴을 주고 있다. 이윽고 문진이 지게를 지고 한길에 나타난다.)
문진 어제 타작해 드린 삯전 받으러 왔수.
참, 수고를 했수. 고단하지 않수?
문진 국서 어디 갔수?
툇마루 볕바른 데서 마름허구 심 따지고 있잖어요. 저기 가서 달라슈.
문진 마름님, 아침 잡수셨수? 국서, 어때? 평년보다 퍽 늘었지, 추수가?
국서 몇 섬 늘기는 했지만 작년 재작년 도지가 어떻게 밀렸던지?
문진 흥! 도처 춘풍이로구나!
사음
 
(전막과는 딴판으로 쌀쌀하다) 텁석부리, 자넨 걸핏하면 그눔의 도처 춘풍이지! 원, 듣기 싫어 죽겠네! (국서더러) 얼른 주어 보내게, 줄 게 있거든.
국서
 
(십전 동화를 주머니에서 찾아내어) 이것밖에 없는데 어쩌나? 모자라는 것은 짚이나 한 짐 져다 쓰게.
문진 이왕이면 돈으로 받았으면 좋겠는데.
국서 있으면 어련하겠나.
문진 제기랄! 짚이라두 지고 가겠네, 그럼. (지게를 마당에 받치고 국서 처더러) 새끼 있거들랑 좀 빌려 주슈. 지게꼬리를 안 가지고 왔군요.

 
(찾아 보며) 늘 말똥이가 집안을 가신다구 새끼토막까지 치워 버렸나베? …… 자, 이것이라두 이어서 쓰시우.
문진 (토막난 새끼를 이으며) 참 귀찬이네 집 빚을 댁에서 안아 맡기로 하신다구요?

 
그리라두 하지 않으면 괜히 생자식 하나를 죽이겠는 걸 어떻게 해요. 그래, 아침 먹자 이내 말똥이 아저씨를 읍내 그 빚쟁이한테 보냈죠. 귀찬이 아범 안 통해서 …….
문진
 
 
말하자면 변돈 내어서 색시 사가지구 그 알령하신 아드님께 좋은 변 뵈 줄려는 셈이로군요. 허참! 굉장한 생각인데요! 허지만 이것 봐요. 귀찬네 집에서 딸을 주는 건 실상을 따져보면 댁의 소를 보고 그래요. 그래서 계집애를 주려는 거야.

 
호호호 …… 그것두 그럴 법한데. 이 동리 작인으로 소 가진 집이라구는 밭 가운데 윤순네허구 우리허구 단 두 집뿐이니까요. 동리에선 우리집에 소 있다구 우리를 막 부자라구 한대.
문진 참, 좋은 눔의 세상이야. 돈만 있으면 못 허는 게 없거든! 그래, 말똥이는 일을 다시 잘 하나요?

 
 
그놈이 오늘은 먼동이 트자마자 일어나서 야단이라우. 어제 타작해 논 곡식을 그눔이 혼자서 죄 말질을 해냈다우. 그리고는 거름을 져낸다 집안을 쓴다, 개똥을 줍는다, 소똥을 치운다 …… 에그 세상에! 어찌 그렇게 변할까. 그눔이 어제와는 아주 딴판이라우.
문진 으흣흣 …… 자식 참!

 
 
요즘 젊은 녀석들은 왜 그렇게 변죽이 좋아. 그저 좋으면 쨀쨀거리고 싫으면 뚱허구! 말맙쇼. 뚱딴지 같은 우리집 말똥이가 그런데, 세상 젊은 놈들은 오죽이나 …… 에그, 저기 말똥이가 오네. 저 꼬락서니 좀 봐요, 좋아서 싱글거리는 꼴을.
(말똥이, 짐을 한 짐 한 짐 잔뜩 지고 꾸역꾸역 나타난다. 속으로 해죽해죽 웃으면서 무대를 횡단하려 할 때에 문진이 말똥이를 붙들고 놀린다.)
문진 얘, 말똥아! 너 참 좋더구나, 귀찬이한테 장갈 가게 돼서.
말똥이 나는 막 바뻐유.
문진 허지만 어젠 내게 혼났지?
말똥이 백줴, 사람을 놀리셔! 어머니, 나 밭에 갔다 오께, 쇠여물 좀 낫게 쒀 주어.
문진 그렇지. 쇠여물은 많이 쑤어 줘야지. 네 장가 밑천이거든, 웬 말이냐!
말똥이 듣기 싫어유! (그러나 좋아서) 에헤헤…….
(말똥이 퇴장. 문진이와 국서의 처, 말똥이의 하는 꼴을 보고 허리가 아프다고 웃는다.)
문진
 
(옆구리를 붙들며) 으흣흣 …… 이눔아, 사람 좀 작작 웃겨라! 이그 허리야! 원, 자식이 저렇게두 변할 수가 있담!
(같이 웃으며) 꼴 볼 수 없쥬.
사음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혀를 차며) 원, 그 떠드는 바람에 심 치른 게 다 섞갈려 버리고 말았군!
국서 고만들 웃어!
문진 그럼, 한 짐 지고 갈까. 짚 낟가리는 뒤곁에 쌓였죠?
이리 오시우. (문진이를 데리고 헛간 입구를 통해서 퇴장한다.)
사음
 
 
 
…… 마흔 닷말에다가 서말 두홉을 보태고 게다가 열한말 닷되 두홉을 덜어내며 …… 이것 보게! 서른 일곱말 일곱되. 틀림없지 않나? 그러면 작년치 떨어진 게 두섬 엿말, 재작년치 떨어진 게 석삼 두말! 거기서 금년에 들어온 게 한섬 한말, 그러니까 통 쳐서 여섯섬 일곱말이야. 그럼, 이건 다 어떻게 해 준단 말인가? 저번에 간평하러 왔을 적에 자넨 지주 앞에서 뭐랬나? 이번 추수에는 어떻게 해서라두 다 해드리겠다구 했지?
국서 …… 허긴.
사음 허긴만 찾아서 끝이 날 일이 아니야. 정신 좀 차려!
국서 아따, 헐 대로 다 해드리지 않았수.
사음
 
이게 무슨 배짱이라? 쌀이 없다면 콩이나 팥이나 그렇잖으면 조 같은 것이라도 내놓고 헐 말이지?
국서
 
묵은 도지까지두 이번에 그만큼이나 갚지를 않았어요? 실상 말이지, 그걸 다 치른다구? 집안엔 쌀 한 톨도 남지를 않았어요.
사음
 
 
그런 죽어가는 소리는 작년 재작년 흉년 때 들어서 귀에 아주 젖었어. 인젠 소용 없어 …… 일어나게. 말질해 놓은 볏섬이나 챙겨 보세. 그리고 자넨 내게 주는 말세두 금년에는 변변치를 못했어! 그거 원 생각할수록 고약하거든!
국서 아니 말세만은 그처럼이나 ―.
사음
 
그처럼이 뭐야! 작년 재작년 흉년 때에 자넨 뭐랬어? 요댐 농사만 잘 되면 그저 눈 꿈뻑 감고, 푼더분허게 주겠다구 그러지 않았어? 에이 천하에 원!
(사음, 화를 내며 집 뒤로 퇴장, 국서, 따라간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개똥이, 소장수 A를 데리고 숨어서 들어온다. 소장수 A는 머리 깎고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다.)
개똥이 이리 오오. 마침 아무도 없수.
소장수 A (들어오다 말고) 정말 관계찮어?
개똥이 얼빠진 사람처럼 굴지 말구 정신 바짝 차려.
소장수 A 들키면 혼난다니까 그렇지. 정말 이런 장사는 허구 싶지 않어.
개똥이
 
그대신 임자한텐 이익을 잔뜩 뵈 줄려구 하지 않아? 그저 노자하고 약간의 장사 밑천만 되면 개값으로 팔 테야.
(무대 위에서 사람 오는 기척. 개똥이와 소장수 A, 울타리 뒤에 얼핏 숨는다. 헛간 출입구에서 문진이와 국서 처 나온다. 문진이는 짚을 한짐 잔뜩 졌다. 헛간문을 기어 나오며 ――)
문진 왜 저렇게 마름이 쌀쌀해요. 어제 타작할 때와는 아주 딴판인데.
말세를 욕심대로 못 받아 먹어서 심사가 틀리신 모양이야.
문진 으흣흣 …‥ 도처 춘풍이로군!
인제 드릴 것은 다 탕감됐죠?
문진 걱정 맙쇼.(퇴장)
<중략>


제 3 막
(전막과 같은 무대, 전막과 같은 날 저녁 개똥이는 머리의 상처를 싸매고 헛간 구석에 앉았다. 그는 매우 비통해 보인다. 국서의 아내는 연기를 피우며 군불을 때고 있다. 영실이 문진이 젊은 일군, 그리고 늙은이 등 이웃사람들, 전막에 야기된 소 사건에 매우 긴장되어 있다. 싸늘해진 날씨다. 맑은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무대 한구석에는 짚가리가 쌓였다. 추수가 필한 것이다. 감나무는 잎이 져서 앙상하다. 멀리에서 풍년놀이의 농악소리 들린다.)
늙은이 그래서 그 소는 어찌 됐나유?
별 수 있나요. 마름이 우리 소를 빼앗아 갔쥬.
몇이 그래서?
그뿐이쥬.
문진 으흐흐 …… 도처 춘풍이로군.
늙은이 텁석부리, 그눔의 도처 춘풍이란 소리 좀 그만두게. 그건 무슨 떡에 웃긴가?
젊은 일군 원, 그걸 가만둬요. 나 같으면 한번 들었다 놓지 않구는 안 둬요.
영실
 
허지만 우리가 예 앉아서 호통을 쳐도 소용 없잖어? 여긴 법정이 아니구 우린 재판장이 아니니까.

 
그래, 우린 말똥이 아저씨(국진)를 읍내에 보냈죠. 무든 대서소라든가 변호소라든가 …… 좌우간 그런데 가서 재판을 건대유. 그래가지구 마름허구 지주를 막 혼을 내주고 그리구.
국서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놓으면서) 저녁들 자셨수? (젊은 일군더러) 문서방, 자네두 왔군. (아내에게) 에그, 매워! 웬 연기가 이렇게 끼어?
당신이 한기가 난다기에 군불을 좀 넣었지요.
늙은이 이 사람아, 소 잃고 게다가 병꺼정 얻었으믄 자넨 헐 노릇 다 헌 셈일세그려.

 
모두들 재작년에두 보셨죠? 우리집 막내둥이가 죽었을 적에 그때 이 양반은 눈물 한 방울 안 비쳤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
국서
 
인제 판결이 날 테니까 두고 봐요. 그저 죽어 지내니까 무슨 먹을 콩인 줄 알구. 그렇지만 난 예선 암말도 안 해. 법에다 들여대 놓구 판검사 나으리 앞에서 따질 테니까.
몇이 암, 그래야지.
젊은 일군 그땐 내가 나서죠, 증인으로.
늙은이 나도 나서겠어, 우리 동리 사람 다 거느리고 …….
이렇게 동리에서 막 들고 일어나 줘야죠.
국서 모두들 오늘 낮에 봤쥬? 우격다짐으로 우리 소를 몰고 가는 걸.
일동 보고말고.
국서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그럴 수가 있수? 이건 바로 날강도지 뭐유?
늙은이 여보게들, 정신 차리게. 우리 동리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단단히 들어 덤벼야 해.
몇이 걱정 맙슈. 사발통문을 돌릴 테니까.
국서
 
인제 두고 봐라. 이눔의 마름 녀석! 나를 누군 줄 알구! 앓느니 죽지, 내가 그 소를 빼앗기구 살아! 소는 농가의 명줄야, 명줄! (기침)
기침 나는데 방문을 닫아유. (방문을 닫아 준다.)
영실
 
 
 
(일어서며) 어차피 국서 문자는 아니래두 소는 농가의 명줄인가 봐. 그 소 한 마리 없어지는 바람에 생사람이 좀 다쳐야 말이지. 위선 색시 하나를 이 동리에서 빼앗기게 됐지, 그리고 총각놈이 더벅머리로 늙게 되고 장사를 못해 상승을 하던 눔이 대가리를 깨구, 대주양반이 드러눕게 되구. 이렇게 한 집안이 결딴이 나고서야 소가 우리네 명줄이 아니구 뭐람!
정말 기막혀유.
늙은이
 
자아, 물러들 나지. 일찌감치 드러누워야 내일 또 일을 헐 테니까. (영실이, 문진이, 젊은 일군 등과 같이 인사하고 퇴장.)
문진

 
(나가려다가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은 개똥이더러) 이 자식이 천냥 만냥판을 꿈꾸다가 대갈통만 깨가지구 왜 그러구 있어, 그 어두운 데서? 이 자식아, 부산 바다 고등어뿐만이 아니래. 동해 바다에는 정어리가 터졌다더라. 산떼미같이. 거기에두 한 다리 걸치고 싶잖니?
개똥이 듣기 싫어, 텁석부리!
문진
 
왜 쏘기는, 이 똥을 쌀 자식이? 이놈아, 이왕이면 이 밝은 데 나와서 맑은 하늘이나 쳐다 봐. 가려던 바다엘 못 가거든 그쪽 하늘이나 바라봐야지. 바로 저 샛별 밑이 바다래. 물에 돈이 둥둥 떠 있는 …….
개똥이 빌어먹을? (나가버린다)
문진
 
제법 사람의 새끼라구 제 밑 구린 델 들쳐내니까 싫어 헐 줄 알거든! 흐흐흐 …… 도처 춘풍이로군! (웃으며 퇴장)
(영실, 뭣을 들고 다시 들어온다.)
영실 우리 할멈이 이걸 …… (들고 들어온 음식을 내준다.)
에그, 죽이군요.
영실 국서더러 먹구 기운을 차리라슈. 소를 찾자문 한참 싸워야 할 테니까.
고맙수
말똥이 (허겁지겁 등장하며) 어머니!
어디 갔다 오니?
(말똥이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간다.)
영실 자식 잘 단속하슈. 마름 집에다 불을 싸지르려고 덤볐다구요?

 
 
글쎄, 저 미련스런 놈이 어딨겠어유. <마름 녀석이 우리 소 빼앗아 갔다! 그래서 내 색시는 팔려 가게 됐다! 이눔의 집에다가 막 불을 질러 놔야지. 그래야만 분이 풀려> …… 아, 이렇게 치를 떨고 덤볐어요.
영실 저런!
하도 기가 막혀, 인제 웃음밖에 안 나와유.
말똥이
 
(이때에 부엌에서 물을 키고 나오며) 어머니, 아저씨가 아직 안 돌아왔죠? 여태 나두 아저씰 기다리고 있었어. 큰 고개 위에서
영실 맘 졸이지 말아. 지성이면 감천이다.
말똥이 틀림없이 뒤 잡히고 말죠, 아저씨?
영실 동리 사람들이 하나가 돼서 다 들고 일어났단 밖에.
말똥이 됐어! 됐어, 어머니!
영실 갑니다.
맘을 써 주셔서 고맙수. (영실 퇴장)
말똥이
 
어머니, 큰고개에서 오는 길에 금방 귀찬네 집을 기웃이 들여다 봤더니 마치 초상 난 집 같애요. 귀찬이를 서울로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돼서 …….
어이구 참 너의 아저씬 왜 여태? (부엌으로 들어간다. 농악 소리 들린다.)
말똥이
 
(무슨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앉았다가 휙 일어서며) 거짓말을 해서라도 귀찬이를 못 떠나게 붙들어 둬야겠어.
(말똥이 나가려다 말고 주춤 선다. 농악소리가 별안간 도전하듯 육박하기 때문이다. 국서의 아내, 상에 죽을 받쳐 방으로 들어간다.)
말똥이 (농악소리 나는 데를 향해) 빌어먹을 것들! 저것들이 날 어쩌겠다는 거야?
귀찬이
 
 
 
 
(나타나며) 말똥아, 어떡허면 좋아? 우리 아버지가 나더러 자꾸 짐을 싸래. 내일 첫새벽에 읍내 홍서방인가 하는 거간꾼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구. 맨처음 우리 아버지가 나더러 서울 가랄 때 어느 부잣집에 드난살이 간대서 난 멋두 모르구 좋아했었는데, 글쎄 알고 보니 홍서방이란 그 숭악한 거간꾼한테 팔려 간대. 유자나무집 딸도 그자한테 속아서 그 모양이 됐다는 게 아냐? (흑흑거리며) …… 우리 아버지가 야속해. 자식이 밉거든 그냥 때려 죽일 일이지, 어찌…… (운다)
말똥이 (별안간 웃으며) 하하하 …… 이게 왜 울어! 서울이구 어디구 보따리 쌀 필요는 없어.
귀찬이 (울다 말고 고개를 번적 들며) 응?
말똥이 우리집 소 고스란히 찾게 됐는 걸. 내일 아침에 봐. 여기 매어 있을 것이니.
귀찬이 정말?
말똥이
 
이 멍텅구리! 이 재목이 안 뵈? (세워놓은 생나무를 가리킨다) 산에서 내가 해 온 거야. 이 외양간을 신방으로 꾸미려고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 …….
귀찬이 뭐? ……아이 망측해!
말똥이 흐흐흐……괜히 좋아서 …….
귀찬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말똥아, 그럼 언제까지나 여기서 살 수 있지, 나? 꽃 피고 물 맑은 이 개나리고을이 난 좋아.
말똥이
 
두고 봐, 장가만 가면 난 부지런히 일한다. 그래 너희집 빚은 물론, 소까지 한 마리 멕이게 할 테다. 그러면 네 말마따나 꽃 피고 물 맑은 이 개나리고을이 정말 극락이지 뭐야.
귀찬이 그렇게만 돼 준다면…….
말똥이 자아, 허튼 걱정 말구, 우리 손 한번 잡아봐. (하며 자기의 손을 내민다)
귀찬이 싫어! (손을 뒤로 숨긴다)
말똥이 (대들며) 잡아 봐!
귀찬이 에그그, 싫어! 누가 봐.
말똥이 보면 어때?
(말똥이, 그예 귀찬이를 끌어안으려 한다. 귀찬이, '왜 이래?' 하며 말똥이를 떠다민다. 이때에 방문이 열리며 국서의 아내 나타난다. 말똥이 귀찬이에서 얼른 피해 섰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싸웠나?
말똥이 아뇨.
그럼 왜 그러구들 섰냐?
귀찬이 난 갈 테예유.
더 놀다 가렴.
귀찬이 괜찮아요. (내뺀다)
말똥이
 
가만 있어. 집에 가문 너의 아버진 아무것두 모르고 자꾸 짐을 싸라고 헐 텐데……내가 가서 말해 드려야지.
(말똥이, 귀찬이를 뒤쫓아 퇴장)
에그, 저것들은 저렇게들 서로 좋아하는데…….
(국서의 처, 집안을 치운다. 아까부터 풍년을 축하하고 있던 고깔 쓴 농부 몇, 소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나타난다. 가면을 한 '왜장녀' 앞섰다. 그들 중에는 사음, 우삼, 문진 등도 섞였다. 노래는 한 사람이 매기면 후렴은 일동이 따라 부른다.)
풍년이 와서 볏가리 느니 동리나 방리에 울음꽃 피네!
에헤 데헤야 얼싸 좋고 좋아 어름마 지화자 네가 내 사랑이지.
사음
 
 
 
(지나가려다가 소리친다) 국서! 나오게! 풍년 놀일세! (아무 반응이 없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다놓고 손 비비고 있는 국서의 아내를 발견하여) 말똥네, 대주양반 좀 내놓아. 같이 놀게…… (거들떠 보지도 않고 더욱 열심히 손만 비비고 있다.) 말똥네! 말똥 에미! (대답이 없다. 기가 막혀 문진을 쳐다보며) 나를 죽으라고 축원하는 건 아니겠지?
문진 (사음을 놀리듯 노래) 봄바람 솔솔 큰애기 가슴 풍년이 와서 도처에 춘풍…….
일동 (일제히) 에헤 데헤야 얼싸 좋고 좋아 어름마 지화자 네가 내 사랑이지.
(문진 기타, 우쭐거리며 사음을 둘러싸고 춤추고 노래하며 사라진다. 조금 전에 국진 등장)
<중략>
이웃 사람 우삼이, 귀찬이 부를 어깨에 끼고 노래 부르며 들어온다. 둘이 다 취했다.
우 삼
 
 
 
(노랫소리) …… 꼬기오 닭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구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는 건 싫지 않으나 불쌍하신 우리 부친 누를 믿고 사란 말가. 에구 아버지 ……. 우리 아버지 ……. (흑흑 느껴 우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가 별안간 껄껄 웃는다.) 헛헛헛 ……. 국서 집에 있나? 이리 나와서 내 말 들어 보게. 공양미 3백석에 어복에 장사된 심청이가 효녀라면 우리 귀찬이는 대체 뭐야? 물론 효녀지. 백세에 이름을 날릴 효녀란 말야.
귀찬이 부 놔 주게. 아이, 우삼이 놓게!
우삼
 
몸을 팔어 집안을 구한 네 딸년이 효녀가 아니구 뭐람!(귀찬이가 돈을 받고 팔려갔음을 알 수 있음) 이 자식아! 이 땅에서는 그만한 효녀는 없다. 없어!
젊은 일꾼 웬일이우? 초저녁부터? 또 곤드레만드레구료.
우삼



이 귀찬이 애비의 주머니를 털었지. 탈탈 털어서 한잔 했거든! 웬 말이야! (젊은 일꾼의 귀에다 대고) 여보게, 이놈의 주머니 속에 딸 팔어먹은 몸값이 아직 남었으리라구는 아무도 몰랐지? 그걸 내가 귀신같이 알아냈어! 그래서 털었지!

 
그 돈을 아직 갖고 있었나요? 도지(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사용료) 갚을 때 갚지 않구.
우삼
 
아냐요. 도지 갚을 때 다 치러 주구 영감쟁이 한 장 남은 걸 마저 헐었지요. 그만! (늙은 일꾼을 보더니) 에그! 동리 노인장 앞에서 이거 안됐습니다 ――, 주정을 해서.
늙은 일꾼 자넨 그저 똥팔이 주접쟁이야. 먹는 거라면 귀신같이 알고 덤비거든!
우삼
 
 
 
 
 
이식이천(以食而天, 밥을 먹기 위해서 뭐든지 함. 사기에 전하는 고사로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의미의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에서 온 말)이라니요! 웬 말씀입니까? 그렇게 덤벼야 이 세상은 산답니다. ……아! 얼떨떨한데. 내가 이렇게 귀찬이란 년의 덕을 보리라구 누가 알았겠나. (국서의 처를 보고) 참! 말똥 어머니! 귀찬이 애비가 오늘 저녁에 당신을 좀 뵈러 왔답니다. 말하자면 암사돈 집 영감이 숫사돈 집 마님께 상오례(상견례. 혼례 때 신랑, 신부의 집안이 동등한 예를 갖추어 서로에게 하는 인사)하러 온 것입니다(귀찬이네와 국서네는 사돈이 될 뻔한 사이임). 자 이놈아, 마주서서 절해라!
귀찬이 부 왜 이러나! 미쳤어!
늙은 일꾼 허헛헛……. 자식들의 혼인은 깨졌는데 암사돈 수사돈의 상오례가 웬 말야?
우삼
 
 
아뉴. 상오례는 해야죠. 세상 일이라 뜻대로 못 돼서 색시는 남의 손에 넘어 갔다 하더래도(말똥이가 지주네 곳간에 불을 지르는 사건의 필연적 원인으로 작용함.) 양반의 집 인사가 그렇잖거든요. 말똥네 집과 귀찬네 집은 이미 맘으로 허락한 사돈 간이니까요. 알겠지요?

 
허헛헛……. 말씀이래야 옳수. 그런데 참 귀찮이한테서는 무슨 편지나 있습니까? 혹 편안히 닿았다는 기별 같은 거나?
귀찬이 부 웬일인지 ……. 꿩 꿔 먹은 자립니다. 아직…….
우삼 뭐? 꿩 궈 먹은 자리야? 좀 소리를 똑똑허게 허게!
늙은 일꾼 허기야 일본 땅이 여기서 어디라구 벌써 소식이 있겠나?

 
아니죠. 우리 집에서 소 싸움이 일어난 그 담 다음 날 팔려 갔죠. 그랬으니까 벌써 열이틀이나 사흘은 지났는데요. 있을라면 그동안에 왜 기별이 없겠수?
젊은 일꾼 그쯤 됐으면 며칠 안으로 편지가 오겠군요?
우삼
 
 
 
 
 
 
 
걱정들 말게. 산 사람이 어딜 가겠나? 그저 걔 팔자는 쭉 늘어졌네. 우리 동리를 통치고도 걔만큼 잘된 애는 없거든!(사람이 매매되는 상황에서도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통해 당대 농민들이 얼마나 참담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음.) ……요즘은 가을철이라 벼만 타는 일본인들 날세야 나쁠소냐? 지금쯤은 하늘엔 별도 좋겠다. 걔 귀찬이는 높다른 다락 위서 수란치마('스란치마'의 잘못. 예전에 궁중이나 양반가 부녀자의 치마 끝에 금박을 박아 선을 두른 긴 치마)를 잘잘 끌며 하이카라상(서양식 유행을 따르는 멋쟁이)을 양 품에 끼고 흥야붕야 잘 놀 걸세. 그러다가 흥에 바치기나 하면, 우리 농사꾼의 신세로는 일평생을 두고 구경도 못해 볼 거문고를 무릎 위에 내어 놓고 그저 줄을 고르느라구. (어깨춤을 추기 시작) 지당동당 지당당당당! 이렇게 흐늘거리고 떠들 걸세. 그게 신선놀음이 아니구 뭐람! 이 사람 걱정 말구 두 다리 뻗게. 자네 팔자는 고쳤네.
젊은 일꾼 (별안간) 이것 봐요! 그만 해요! 귀찬이 아버지가 울고 있어요!
귀찬이 부
 
……난 개 같은 놈이야……. 제 자식을 팔아먹은 놈이 개가 아니구 뭐람……. 나는 개야……. (흐느낀다.)
우삼 엑키! 못난 백성 같으니!
꽤 취했나 봐요. 익살은 그만 피고 이 양반을 집에 좀 업어다 주세요.
늙은 일꾼 헛헛헛……. 취중에 진심이라니 자식은 팔어먹기는 했지만 좀 억울해서 그러겠나. 맘도 고운 사람이.
참 사람이야 진국이지요.
우삼
 
 
 
 
 
아뉴. 이놈은 취하기만 하면 잘 우는 놈이야요. 그만 해, 이 친구! 울지 말구 내 말이 어디 거짓말인가, 조금만 두고 기다려 보게. 얼마 안 돼서 자네 딸 귀찬이가 벌어들이는 돈바리 쌀바리 저 신작로 끝에서 끝까지 쭉 늘어다 올 테니까……. 울려거든 그때 울려부나. 사람이란 서러워 울 적에 우느니보다 기쁠 적에 울어야 생색이 나는 거야. 이 자식 멋대가리도 모르고   울기만 허면 그저 제일인 줄 알지. 에 싱거운 백성 같으니라구! 자 그만 허구 자네 여편네한테로 가세! (귀찬이 부를 어깨에 끼고 우삼이 퇴장)
늙은 일꾼
 
(나가는 것을 보다가 젊은 일꾼에게) 문 서방, 우리도 가세. (방을 들여다보고) 국서 ――. 잘 조섭허게(건강이 회복되도록 몸을 보살피고 병을 다스리게).
젊은 일꾼 (국서의 처에게) 갑니다.


편안히 가슈. (늙은 일꾼과 젊은 일꾼 퇴장)(이 부분의 주된 이야기를 이끈 귀찬이 부와 우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일꾼들이 퇴장하면서 귀찬이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음.)
*하강1 → 함께 술을 먹는 귀찬이 부와 우삼이    
-. 우삼이의 역할 : 우삼이는 동네 사람 중 한 명이지만 다소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단 귀찬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귀찬이를 일본인에게 팔고 받은 돈으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다른 인물들에게서 귀찬이와 관련된 더 많은 대화를 이끌어 내도록 한다. 또 다소 희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극에 재미와 비극성을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
-. 귀찬이 부의 태도 변화 : 앞부분에서 귀찬이 부는 귀찬이를 팔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자식을 판 돈으로 물질적인 궁핍을 조금이나마 해결한 데 안도하는 듯했지만, 이 부분에서 귀찬이 부는 스스로를 '개'라고 말하면서 울고 있다. 이를 통해 딸을 팔아 버린 자신에 대한 귀찬이 부의 자책을 엿볼 수 있다.
국서의 처는 군불 넣던 아궁이를 막고 비질을 한다. 유자나무집 딸의 노랫소리 들린다. 행길에 나타난다. 울타리에 기웃, 이 집안을 살핀다. 우편(右便)에서 국진이 등장(소의 행방을 알려줄 국진이 등장하면서 중심 소재인 소를 둘러싼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될 것임을 알 수 있음), 국서의 처 ――. 국진이를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어서 오세요. 어찌 됐수. 재판이?
국진 (울타리 쪽을 보고) 거기 선 게 누구야?
유자나무집 딸 히힛힛……. (사라진다)
그 미치광이 년이로군요. 에그 깜짝이야. 저것이 요즘도, 그저 개똥이를 따라서 큰일이야요.
국진 형님은 계시죠, 방에?
국서

(문을 열고 나오며) 어찌됐니, 국진이? 재판 날짜는 언제라든?(이 말에는 억울하게 빼앗긴 것이므로 재판을 하면 소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국서의 인식이 집약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순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일제의 폭압에 당하기만 하는 당시 농민들의 무지함이 드러나 있음.)
국진

재판은 안 걸고 왔어요.(국서는 재판을 하게 되면 이전부터 이미 많이 밀려 있던 도지까지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아들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를 묵은 도지 대신 내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암만 생각해두 재판이 걸린댔자 우리헌테 이로울 게 없겠습니다.
국서 그게 무슨 소린가?
국진
 
 
좌우간 대서수에 가서 이번 일이 일어난 내력을 제가 자세히 말했지요. 그랬더니 거기서 그 시비곡절을 잘 따져 주는데, 그럴 법하더군요. 즉,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디다. 지금 재판을 걸기만 한다면 우리 소원대로 우리 집 소는  제깍 찾어낼 수가 있답니다.
국서 암, 그렇구말구. 단번에 찾어낼 수 있는 거지. 그래서?
국진
 
 
 
 
 
 
허지만 뒷일이 까다롭답니다. 그때에는 논임자 편에서 그저 있지는 않을 거라니까. 만일 그쪽에서 받으려는 묵은 도지를 두고 집행을 한번 텅   붙이는 날이면 참 큰일난대요. 우리 이 집이며 집터 같은 것은 단번에 날러가 버리고 우리는 그야말로 화전(주로 산간 지대에서 풀과 나무를 불살라 버리고 그 자리를 파 일구어 농사를 짓는 밭)이나 파먹지 않으면 안 될 신세가 돼 버릴 거래요. 그리고 소 한 마리 찾어내는 데 경치게두(놀랍게도) 웬 비용은 그렇게 듭니까? 우선 대서비(관청 행정이나 법률 행위에 필요한 서류를 대신 작성해 주고 받는 돈) 없어서는 안 될거구, 그 외에 읍내에 왔다 갔다 하는 차비며 증인 서 주는 동리 사람들헌테 그래두 막걸리 잔은 받어 줘야죠. ―― 이렇게 잔잔한 비용을 통 따져 보는 데 되려 재판 한 번 거는 비용이 소값보다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혹 떼러 갔다가 되려 혹 붙이고 오는 짝이 되게요?
국진
 
 
그러기에 말입니다. 나두 맨 천 번은 멋도 모르고 그저 재판만 걸어 주십사 허구 조르다가 나중에 이런 말을 듣고 놀랬어요. 그리고 손해 가는 것은 어디 그것뿐입디까? 결국 논까지 떼이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내년부터 우리는 뭘 갈어 먹구 삽니까?
개똥이 헛간 입구에 나타난다.(관객은 개똥이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개똥이가 자연스럽게 소를 아예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임을 짐작하게 됨.)  다른 사람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모른다.
국서
 
 
그렇지만 이 사람! 그 소의 사촌의 아버지의 큰형은 도 장관 나으리께서 일등상을 받지 않었나? 그런 내력 있는 소를 그저 빼앗기구 있어! 원 사람이 분해 죽을 일이야! 그리고 이 사람 동리서는 모두 증인으로 법정에 나서 줄려구 그런다. 아까 문 서방도 나서겠다구 그랬어.
국진 그렇지마는 형님, 더구나 이번 일만은 성미대로 했다가는 큰일나겠습니다.
국서 그래서 읍에서 넌 어째구 왔어?
국진

논임자를 찾아갔지요. 그래 그만 거기서 화해를 붙여 버렸습니다.(국서네는 더 이상 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지주는 묵은 도지를 받지 않고 국서네가 논을 계속 부치도록 허락하는 선에서 화해를 하는 것으로 함.)
국서 화해를?
국진
 
네. 논임자 편에서 팔어먹은 소에 대해서는 우리는 앞으로 이의 없기로 허구. 그 대신 그 쪽에서는 우리가 갚어야 할 도지를 안 받기로 했습니다.
국서 그러니까 소하고 도지를 서로 탕감해(빚이나 요금, 세금 따위의 물어야 할 것을 덜어) 버린 셈이로구나.
국진 그리고 게다가 또 내년부터 여태 부치던 논을 우리가 도로 부치게 했어요.
아주 그렇게 화해가 됐수?
국진 "응." 허구 논임자가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어요. 이렇게 도장까지 받어 왔지요.
국서
 
(문서를 받아 보고) 이런 빌어먹을! 그 내력 있는 소를 그만 빼앗기구! 원 천하에! 그러면 이 종잇조각 한 장으로 나는 다시 두 말 못 허게 된단 말이지?

 
 
그 대신 도지가 갚였으니 피장파장이지요. 무엇보다두 도로 논을 얻어 부치게 된 게 천만다행이구려. 농사꾼이란 그저 손바닥 같은 거라두  파먹을 땅뙈기가 있어야 살지요. 밭을 부칠 데가 있어야 살지요.
국서
 
 
(울며) 에 분해! 그럼 우리 소는 그 색깔 좋은 소는 어떡한담! 울음소리도 예쁘고 앞가슴이 쩍 벌어지구 해서 이 동리에서는 일등 가는 손데 그만 그걸 빼앗기구 만담. 에이 분해, 우리 집은 그만 망했어……. 소 잃고 잘 된 놈의 집안은 없어……. (울고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 왼종일 읍에 가서 수고해 온 보람 없이 왜 야단만 해요……. 좀 울지 말우…….
*하강2 → 재판을 포기하는 국서  
이웃 젊은 사람 수 명 황급히 뛰어 들어온다.
젊은 사람 (뛰어 들어오며 숨을 헐떡이며) 말똥 어머니! 말똥 어머니! 큰일났수! 큰일이야!
국서 이것 뭐야? 어찌 된 일이야!(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기능을 하는 대사)
젊은 사람 (우편 하늘을 가리키며) 저것 보세요! 막…… 막 불이 났어요. 불이야요.
국서 (방에서 나오며) 불이라니?
젊은 사람
 
신작로 돌다리 가에 있는 댁의 논임자의 곳간 알지요? 거기서 불이 붙었어요. 말똥이가 지른 거야.
국서 말똥이가?
저런! 저 육실헐 놈이! 저 뚱단지 같은 놈이 기어쿠 저지르고 말었구나. 에그 이 일을 어쩌나!
젊은 사람 얼른 가세요.
국진 대관절 말똥이는 어딨어? 말똥이는 말야?
젊은 사람
 
잡혔어요. 주재소 숭금청 나으리헌테 붙들려 갔죠. 불을 질러 놓고도 말똥이는 도망도 허지 않고 그 자리에 장승같이 꾹 서 있었어요. 그래서 잡혔지요. (젊은 사람들 퇴장, 국진이 같이 ――)

 
(허둥지둥하며) ……저런 고집퉁이 봐! 에그 잘 잡혀 갔다. 그놈이 장가를 못 가니까 심술이 나서……. 그저 눈이 뒤집혀진 모양이야. 바로 미쳤어……. 미쳐……. (퇴장)
국서 (방으로 기어들어가며) 넨장. 내 아랑곳 아니야!(인물의 심리,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는 대사)
무대는 조용해졌다. 먼 하늘이 붉어져 온다. 불 종소리 들리기 시작(무대 지시문, 작품의 배경, 등장인물, 무대장치 및 소도구의 배치, 음향효과 등의 처리를 지시함). 개똥이 혼자 우두커니 붉어진 하늘을 바라보고 섰다가 (행동 지시문, 등장인물의 동작, 표정, 말투, 입장 및 티장, 심리 등을 지시함.)
개똥이






 
흐흣흣……. 그예 불 소동이야……. 어서 이 아픈 데만 나으면 나는 걸어서라두 만주로 갈 테야. 넓은 북쪽으로 떠나가야지……. 하루라두 속히 여기를 떠나가야 살지…….
( * 희망이 없는 농촌의 젊은이들 : 이 작품에서 개똥이는 계속 '만주의 꿈'을 키우고 있는 인물이다. 농촌의 모순된 구조 때문에 농사로는 가난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똥이는 틈만 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는 곳인 만주로 떠날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개똥이만의 것이 아니라 1930년대 당시 농촌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희망 없는 농촌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은 농사만이 살길이라 믿는 기성세대보다도 더 불안하고 안주할 수 없는 허황된 꿈만 바라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비극적이고 절박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
유자나무집 딸, 노래 부르며 나타난다.
유자나무집 딸





 
 
(약간 취했다.) 히힛힛……. 개똥아! 너 혼자 있구나. 나두 만주 갈 테야……. 너허구 같이. 데려다 주. 사람이 날 보구 돌질허지 않는 데로 같이 데려다 주. (그러면서 개똥이헌테 붙안기려 한다. 개똥이 뿌리쳐 버린다. 다시 일어나며) 히히힛……. 나두 같이 갈 테야…….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
( * 여성의 유린된 삶-유자나무 집 딸의 비극 : 이 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드러내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유자나무 집 딸이 있다. 그녀는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인물인데, 그녀가 겪었던 과거는 일제 강점하에서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우리 민족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상황 속에서 겪은 상처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와, 그녀는 매일 돌팔매질을 당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유자나무집 딸이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일제의 억압 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의 잘못된 비난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면서 당시 여성들의 삶이 처절하게 유린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개똥이 저리 가!
유자나무집 딸 히힛힛…….
*대단원 → 지주네 곳간에 불을 지른 말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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