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용암포사건,1903년,러시아,대청7개조,용암포조차

Jobs 9 2021. 4. 10. 00:35
반응형

1903년 러시아가 용암포 및 압록강 하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한 사건.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과 을미사변을 거쳐 고종의 아관파천이 이뤄지면서, 조선정부 내에는 친러파가 득세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 결과 1896년 4월 러시아인 니시첸스키(Nisichensky)가 함경북도 경원과 경성의 광산채굴권을 차지하였고, 그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상인 브린너(Bryner, Y.I.)가 두만강유역·압록강유역·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1898년에 뤼순(旅順)·다롄만(大連灣)을 조차한 다음, 이미 확보한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활용, 하얼빈역에서 뤼순에 이르는 남만주지선(南滿洲支線)의 부설권까지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부청멸양(扶淸滅洋)을 외치며 봉기한 의화단(義和團)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열강과 함께 공동출병한 러시아는, 이를 타도한 다음에도 대병력을 그대로 만주에 주둔시켜 만주를 자국의 세력범위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러시아의 적극정책은 일본의 조선진출과 이해가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하는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때 러시아는 그 해 4월청나라와 만주철병협정을 체결, 6개월씩 3기로 나누어 철병을 완료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해 10월 1차 철병을 완료한 러시아는 1903년 4월 갑자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보다 적극적인 만한전진정책(滿韓前進政策)을 추진하였다.

이는 대한정책(對韓政策)을 결정하는 데 있어 이 지역으로의 평화적인 침투를 표방하던 재상(財相) 비테(Witte), 외상 람스도르프(Lamsdorf) 등의 온건파가 영향력을 상실한 반면, 만한적극책(滿韓積極策)을 강력히 주장하던 러시아왕실 내장원대리인(內藏院代理人) 베조브라조프(Bezobrazov)와 동아시아문제특별위원회 부의장 플레베(Plehve), 위원회 비서 아바자(Abaza) 등 이른바 ‘한국파’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러시아는 용암포점령계획을 추진하였다.

경과와 결과

러시아는 1903년 4월부터 삼림채벌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사전동의 없이는 만주를 개방할 수 없다는 등의 대청7개조(對淸七個條)를 요구하였다.

한편, 5월 초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의 일부가 압록강하구 및 용암포까지 진출, 한국인 명의로 토지를 매입하고 병참부로 사용할 창고 및 사무소 건설공사에 착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마산(白馬山)의 벌목까지 강행함으로써 그들이 확보한 압록강삼림채벌권의 범위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6월안동(安東)·용암포 간에 수저전선(水底電線)을 가설하기 시작하였으며, 7월에는 러시아삼림회사 한성주재원(漢城駐在員) 귄즈버그(Gunsburg)와 한국왕실 내장원경(內藏院卿)인 이용익(李容翊)이 서로 결탁, 사방 10리의 용암포의 토지를 러시아삼림회사의 목재저장소로 대여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업무를 주선하고 집행하기 위해 친러파 조성협(趙性協)이 삼림감리(森林監理)로 파견되어, 러시아삼림회사 총무인 모지스코(Mogisko)와 교섭, 7월 20일 용암포조차에 대한 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같은 조차가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과 영국은 즉각 반발하였다. 일본의 고무라(小村)외상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즉각 전문을 보내어 이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하야시는 용암포를 러시아의 조차지로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며, 모든 나라가 균점할 수 있는 개항장으로 개설하라고 조선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항의에 대해 조선 외부(外部)는 하야시에게 “그 조약은 조성협 개인이 체결한 사적인 것일 따름이며, 용암포를 개항장으로 만들 의사가 있다”라는 언질을 하고 말았다. 이처럼 용암포조차에 대한 조약이 조인되지 않고 조선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9월 중순부터 용암포의 뒷산인 용암산에 포대(砲臺)를 구축하고 석탄 및 탄약을 적재한 선박을 입항시켰으며, 용암포에서 약 10리 정도 하류에 위치한 두류포(斗流浦)에 망루를 건설하는 등 노골적인 군사기지화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용암포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은 날카롭게 대립하였고, 이것은 러일전쟁 발발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1904년 3월 23일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의정부참정 조병식(趙秉式)이 의정부의 의결과 황제의 재가를 받아 용암포를 통상구안(通商口岸)으로 선언하였다.

그 결과 용암포는 러시아의 조차지가 아니라 개항지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용암포는 간만의 차가 심하고 얕은 수심으로 만조시에도 대형선박의 입항이 어려워 수출입항구로서보다는 어항으로 발전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스마트폰 공무원 교재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반응형